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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rt&History] 갈등의 불씨 된 한일 청구권 협정
- [역사 속 그날] 역사 속 이번 주엔 어떤 일이 있었을까? 기록이 뚜렷하게 남아있는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시작으로 근현대까지의 같은 날 있었던 사건들을 한 주 단위로 파악합니다. 이번 주는 12월 15~21일 발생했던 역사적인 사건들을 살펴보세요.1965년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한일 기본조약 비준서에 서명하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1965년 12월 18일, ‘한일 기본조약’ 발효해방 이후 우리나라는 식민 지배를 했던 일본과는 외교 관계를 끊고 지내왔습니다. 미국은 일본이 소련(옛날의 러시아)과 중국처럼 공산 세력권에 흡수되어 태평양 안보를 위협하기 전에 한국과 일본을 수교(외교 관계를 맺음) 시켜 동북아시아 협력 체제를 구축하고자 했습니다. 이에 미국의 주도 하에 1951년부터 한일 수교를 위한 조약 교섭(어떤 일을 이루기 위하여 서로 의논하고 절충함)이 시작됐습니다.1965년 박정희 정부는 학생 시위대와 야당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14년 간 끌어온 국교정상화 교섭을 마무리 짓고 ‘한일 기본조약’을 체결했습니다. 한일 기본조약은 7개의 기본 조약과 함께 부속된 4개의 협정 및 25개의 문서로 구성됐습니다.부속협정으로는 청구권·경제협력에 관한 협정 등이 있습니다. 특히 청구권 협정의 제2조는 ‘양국의 모든 청구권(권리가 침해됐을 때 국가·단체에 일정한 요구를 할 수 있는 권리)에 관한 문제는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다는 것을 확인한다’고 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발생한 강제징용(사람을 강제로 끌고 가 일을 시킴) 및 위안부 피해자들이 청구권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포함시킨 것이지요. 협정을 체결한 뒤 일본은 한국 정부에 무상원조 3억 달러, 유상원조(차관) 2억 달러를 제공했습니다. 당시 정부는 이 자금을 경제 개발에 사용했습니다.제2차 세계대전 패전국인 일본은 한국에 청구권 자금을 지불하기는 했지만 침략이나 지배에 대한 반성이나 사죄의 의미는 담지 않았습니다. 그저 경제협력이나 원조의 의미로 지불한 것이지요. 한일 청구권 협정은 현재까지도 한일 관계를 위태롭게 하는 요소입니다. 지난해 한국 대법원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가 강제노역을 한 한국인 피해자 4명이 일본 기업 신일철주금(현 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피해자들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개인에 대한 배상청구권은 살아있다고 본 것이지요. 그러나 일본은 일관되게 1965년 협정에 의해 모든 배상 문제는 해결됐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고, 이것이 양국 간 무역갈등으로까지 번지게 됐습니다.아리랑 1호가 한반도 위를 나는 상상도1999년 12월 21일, 한국 항공우주연구소, 아리랑 1호 발사 성공1999년 12월 21일, 우리나라 최초의 다목적 실용위성인 ‘아리랑 1호’가 미국 캘리포니아 주 반덴버그 공군기지에서 성공적으로 발사됐습니다. 아리랑 1호는 발사 후 81초 만에 1단계 로켓을 분리하고 13분48초 후에는 685㎞ 상공의 궤도에 진입했습니다.무게 470㎏(높이 235㎝·너비 134㎝·길이 690㎝)의 아리랑 1호는 △전자지도 제작 △한반도, 해양 관측 △우주환경 관측 등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발사된 위성입니다. 아리랑 1호는 고도 685㎞에서 하루 세 차례가량 한반도 하늘 위를 지나면서 한반도와 주변 지역 나라의 정밀지도를 제작하는 데 도움을 줬고, 재난 예방을 위해 촬영한 영상을 지상으로 전송하는 역할도 했습니다.예정됐던 3년의 임기를 훌쩍 넘겨 8년간 운영되던 아리랑 1호는 2007년 통신이 두절됐습니다. 이듬해 2월 아리랑 1호의 공식 임무가 종료됐지요. 아리랑 1호는 지구를 4만3000여 회 돌며 47만 여 장의 위성사진을 촬영했습니다. 아리랑 1호는 우리나라 인공위성 기술 발전의 발판을 마련했습니다.1980년 전남도청 앞에서 전남대 학생들과 시민들이 민주화 시위를 벌이고 있다. 나경택 촬영·518기념재단 제공1995년 12월 19일, 국회에서 5·18 특별법 통과961년 5·16 사태 이후 길었던 군사정권을 마무리하고 1993년 취임한 김영삼 당시 대통령은 자신의 정부를 최초의 ‘문민정부’로 규정하고 대대적인 개혁을 시작했습니다. 그중 하나가 바로 5·18 광주 민주화 항쟁에 대한 진상 규명이었습니다.김영삼 정부는 1980년 5월 18일을 전후로 해 전라도 광주에서 민주화 시위를 일으킨 시민들을 무차별적으로 죽인 당시 신군부세력에 적절한 처벌을 내리기 위한 방안을 마련했습니다.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한 것이지요. 특별법은 법의 효력이 특정한 사람이나 사항 및 특정 지역에만 적용되는 법을 말합니다.5·18 특별법은 1979년 12월 12일 사건과 1980년 5월 18일 민주화운동을 전후해 발생한 헌정질서 파괴범죄 행위에 대한 ‘공소시효(범죄에 대해 처벌할 수 있는 기한) 정지’ 등을 규정했습니다. 이에 당시 내란죄 등과 관련된 공소시효는 만료됐지만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의 재임 기간을 시효에서 제외해 이들을 처벌 대상에 포함할 수 있었습니다. 1997년 김 전 대통령은 국민대화합의 명분으로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 받은 전 전 대통령과 17년형을 받은 노 전 대통령을 특별 사면(죄를 용서해 형벌을 면제함)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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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rt&History] 거란군 크게 무찌른 강감찬 장군
- [역사 속 그날] 역사 속 이번 주엔 어떤 일이 있었을까? 기록이 뚜렷하게 남아있는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시작으로 근현대까지의 같은 날 있었던 사건들을 한 주 단위로 파악합니다. 이번 주는 12월 8∼14일 발생했던 역사적인 사건들을 살펴보세요.경기 수원시 광교공원에 있는 강감찬 장군 동상. 동아일보 자료사진1018년 음력 12월 10일, 강감찬, 거란의 소배압에게 맞서 대승을 거둠지금의 중국 땅에 위치한 나라였던 거란은 10세기 말부터 11세기 초까지 세 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공했습니다. 중국 전역으로 세력을 넓히고자 했던 거란은 송나라와 친한 고려가 탐탁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993년 거란의 장수 소손녕이 80만의 군대를 이끌고 고려로 내려왔습니다. 고려의 문신이었던 서희는 뛰어난 외교술을 발휘해 소손녕과 담판을 벌였습니다. 송나라와 관계를 끊고 거란을 적으로 삼지 않겠다고 안심시켜 소손녕 군대를 철수시킨 뒤 거란으로 가는 길목인 압록강 부근의 땅까지 얻어냈습니다. 그리고 고려는 이 지역에 ‘강동 6주’를 설치했지요.뒤늦게 압록강 지역이 요지였다는 것을 깨달은 거란은 1010년 다시 고려에 쳐들어왔습니다. 거란군은 고려의 수도인 개경을 정복하기도 했지만 확실한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고려군과 대치했습니다. 군대를 철수시키면 고려왕이 직접 거란에 가서 예를 올리겠다는 제안을 받고나서야 물러났습니다. 이때 고려는 돌아가는 거란군을 곳곳에서 공격해 큰 타격을 입혔지요. 고려는 예를 올리겠다는 약속도 지키지 않고, 강동 6주를 돌려주지도 않았습니다.화가 난 거란은 1018년 세 번째로 고려에 침입했습니다. 거란의 장군 소배압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략했고 70대 노장이었던 강감찬 장군이 그에 맞서 싸웠습니다. 강감찬은 평안북도 흥화진에 기병 1만2000명을 배치하고 흥화진 앞에 흐르던 강물을 막았다가 거란군이 건너갈 때 터뜨리는 전술을 펼쳤습니다. 흥화진에서 예상치 못하게 큰 피해를 입은 소배압은 물러서지 않고 개경으로 나아갔습니다. 개경 진입을 코앞에 두고 기습부대의 공격을 받은 거란군은 싸울 의지를 잃고 철수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강감찬은 돌아가는 거란군을 다시 공격했습니다. 물러서는 소배압과 강감찬이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곳이 바로 ‘귀주’이고 이 싸움을 ‘귀주대첩’이라고 하지요.고려군과 거란군이 팽팽하게 맞서 처음에는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았으나 개경에 있던 고려군 부대가 합세하면서 거란군에게 불리한 상황이 됐습니다. 고려군은 북쪽으로 달아나는 거란군 대부분을 처단했습니다. 살아서 돌아간 거란군은 수천 명 밖에 되지 않았고 소배압은 갑옷에 무기까지 버리고 죽기 살기로 압록강을 헤엄쳐 달아났다고 전해집니다.[한 뼘 더] 중국엔 만리장성, 고려엔 ‘천리장성’이?기원전 220년 진시황이 쌓기 시작해 명나라 시대까지 지어진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군사 시설인 중국의 만리장성. 고려 때 우리나라에는 천리장성이 있었다는 사실, 알고 있나요?거란과 세 차례나 크게 싸운 이후 고려는 거란을 비롯한 여진 등 북방 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북쪽 국경선을 따라 약 1000리에 이르는 긴 성을 지었습니다.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크고 긴 성이었지요. 높이는 8m, 길이는 약 393㎞에 이르렀으며 총 12년에 걸쳐 쌓아 올렸습니다. 이후 천리장성은 고려의 국경이 되었고, 외적의 침입을 막는 중요한 역할을 했지요.서울 송파구 석촌호수 초입에 있는 남한산성 삼전도비1636년 음력 12월 14일,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난함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조선 제16대 왕인 인조는 자신을 왕위에 올려준 신하들의 바람대로 ‘친명배금’ 정책을 실시합니다. 명나라를 지지하는 인조를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던 후금은 조선을 공격했습니다. 후금을 피해 인조는 강화도로 몸을 옮깁니다. 이것이 정묘호란이지요.후금은 나라 이름을 청으로 바꾼 뒤에는 황제의 나라인 ‘제국’을 선포하고 조선을 더욱 압박하며 군신관계를 맺을 것을 요구했습니다. 청은 왕, 조선의 신하의 나라임을 인정하는 굴욕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인조는 청과의 전쟁을 선포했습니다.압록강을 건넌지 불과 14일 만에 개성에 도착한 청은 조선에게는 너무도 막강한 상대였습니다. 인조는 급히 남한산성으로 몸을 옮겼습니다. 남한산성에서 버티며 장기전을 벌이면 청군도 지쳐 돌아갈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지요. 청군은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조선군이 항복하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식량 부족과 추위 등으로 더 이상 산성 안에서 버틸 수 없게 되자 인조는 세자와 함께 남한산성 서문으로 나가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신하의 예를 갖춥니다. 이것을 ‘삼전도의 굴욕’이라고 합니다.리우올림픽 여자골프 국가대표 감독으로 활동할 당시의 박세리1998년 12월 8일, 박세리, LPGA 올해 선수로 선정온 국민이 IMF 경제위기의 영향으로 힘들어하던 1998년, 미국에서 기쁜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우리나라의 박세리 선수가 미국여자프로골프협회(LPGA) 투어 메이저 대회인 US여자오픈에서 한국인 최초로 우승을 했다는 뉴스였죠. LPGA 투어는 세계적 권위를 자랑하는 여자 국제 프로 골프대회입니다. 앞서 또 다른 메이저 대회인 맥도널드 LPGA 챔피언십에서 정상에 오른 것에 이은 쾌거(통쾌하고 장한 행위)였습니다. 박세리는 1998년 LPGA 올해의 신인왕과 미국 골프기자협회가 주는 올해의 여자 선수상 등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세계 무대에 데뷔했습니다.이후 박세리는 2001년 브리티시여자오픈 투어 우승에 이어 2002년 LPGA 챔피언십 우승을 차지하며 만 24세의 나이로 최연소 메이저 대회 4승이라는 기록을 달성하기도 했습니다. 2004년 5월 LPGA 투어 미켈럽울트라오픈에서 우승하며 LPGA 명예의 전당에 오르기 위한 조건을 모두 충족했고, 2007년 6월 아시아인 최초이자 최연소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우수한 업적을 인정받아 명예로운 자리에 오름)됐습니다.이후 2016년 US여자오픈이 끝나고 2016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여자골프팀 감독으로도 활약하며 박인비 선수의 금메달을 이끌어내기도 했습니다. 박세리는 같은 해 10월 LPGA 투어 KEB하나은행 챔피언십 경기를 끝으로 20여 년 간의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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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rt&History] 비운의 황태자였던 영친왕
- [역사 속 그날] 역사 속 이번 주엔 어떤 일이 있었을까? 기록이 뚜렷하게 남아있는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시작으로 근현대까지의 같은 날 있었던 사건들을 한 주 단위로 파악합니다. 이번 주는 12월 1∼7일 발생했던 역사적인 사건들을 살펴보세요.1911년 영친왕(왼쪽에서 다섯 번째)과 이왕직 소속 관리들이 석조전 중앙홀에서 찍은 기념사진. 동아일보 자료사진1907년 12월 5일, 이토 히로부미, 영친왕을 일본으로 끌고 감1907년 12월 15일,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1897∼1970)이 일본 도쿄의 신바시역 플랫폼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는 통감(일제강점기 통감부 장관)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였습니다. 영친왕은 조선의 마지막 왕이자 대한제국 제1대 황제인 고종의 일곱 번째 아들입니다.당시 불과 10세였던 영친왕은 부모인 고종황제와 엄황귀비 품을 떠나 인천항을 출발한 지 열흘 만에 일본에 도착했습니다. 유학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에 갔지만 사실상 인질로 잡혀간 것이었지요.1907년은 고종황제가 일제에 의해 강제로 폐위(왕의 자리를 폐함)되고 고종의 맏아들인 순종이 황제로 즉위한 해입니다. 이와 함께 고종의 일곱 번째 아들 영친왕은 황태자(황제의 자리를 이을 이)로 책봉됐습니다. 황태자라는 중요한 자리에 있음에도 영친왕은 대한제국이 쇠퇴하는 가운데 일본에 볼모(나라 사이에 조약 이행을 담보로 상대국에 억류하여 두던 유력 인사)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일본에 건너 간 영친왕은 조국이 몰락하는 것을 지켜보며 하루하루 힘겨운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1910년 일제의 침략으로 대한제국이 국권을 상실하자, 일제는 순종을 황제에서 왕으로, 영친왕은 황태자에서 왕세제(왕위를 이어받을 왕의 아우)로 강등(계급을 낮춤)시켰습니다.1920년엔 일본의 강요에 의해 일본 왕실 출신인 나시모토 마사코(한국명 이방자)와 정략결혼을 했습니다. 황태자가 되기 전 동갑내기 소녀와 약혼한 상태였지만 일제는 이를 무시하고 강제로 결혼하게 했습니다.일본에 거주하며 철저한 일본식 교육을 받은 영친왕은 일본 육군사관학교와 육군대학을 거쳐 육군 중장(군대 계급의 하나)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1945년 광복 이후 조국으로 돌아오려고 했지만 이승만 정부는 귀국을 거부했습니다. 이후 재일(일본에 살고 있음) 한국인의 신분으로 일본에서 지내야 했던 영친왕은 1963년이 되어서야 박정희 정부에 의해 입국이 허락되어 꿈에 그리던 한국 땅을 밟았습니다.그러나 영친왕은 귀국 당시 뇌혈전증(뇌에 혈액공급이 차단돼 나타나는 증상)으로 실어증(언어를 이해하거나 구사하는 능력에 장애가 발생하는 증상)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결국 약 7년간의 투병 끝에 1970년 한 많았던 생을 마쳤습니다.[한 뼘 더] ‘친왕’과 ‘왕’의 차이는?대한제국이 수립한 뒤 태어난 고종 황제의 아들 이은은 태어날 때부터 그 신분이 ‘황제의 아들’이었고 1900년에는 ‘영친왕’으로 책봉됐습니다. 황제의 아들이 왜 ‘왕(王)’이 됐을까요? 대한제국 시기에는 황제의 황위를 물려받을 황태자 한 명을 제외한 나머지 아들들은 모두 ‘왕’으로 책봉했습니다.황제의 아들로 태어났기에 왕이 된 이들을 다른 종류의 왕과 구분하기 위해 굳이 ‘친왕’이라고 특별히 구분된 왕호를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이은이 받은 왕호 역시 ‘친왕’이었고, 왕호에 붙인 이름이 ‘영’이었기 때문에 그가 ‘영친왕’이 된 것이지요.지난 2010년 과거사 정리 위원회가 사건에 대한 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2005년 12월 1일,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 설립2005년 5월 31일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기본법’이 공포(널리 알림)되면서 같은 해 12월 1일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가 출범했습니다. 이 위원회는 일제강점기 직전부터 제6공화국까지 약 100년간의 과거사를 조사하기 위해 꾸려진 독립기관이었습니다.과거사 정리 위원회는 △항일독립운동 △6·25 전쟁 전후의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 △반민주적·반인권적 행위에 의한 인권 유린(권리를 짓밟음) △폭력·학살·의문사 등을 조사해 왜곡된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과거사를 바로잡기 위해 노력했습니다.출범한지 4년 2개월 여 만인 2010년 6월 30일 조사 활동을 공식 종료할 때까지 위원회는 접수되거나 직권 조사한 사건 1만1160건 중 9987건의 처리를 마쳤습니다. 이 중 진실을 밝힌 사건은 7700건이며 문헌, 목격자, 현장자료가 부족해 진실을 규명하지 못한 사건은 221건입니다. 나머지는 기각된 사건입니다.진실이 밝혀진 사건에 대해 해당 국가기관에 위령 사업 추진 등의 권고를 내렸지만, 강제성이 없어 후속조치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는 비판도 받았습니다.서울 종로구에 있는 ‘녹두장군’ 전봉준의 동상1894년 음력 12월 2일, 전봉준, 순창에서 체포돼 서울로 보내짐유난히 작은 몸집 때문에 ‘녹두’라 불렸던 전봉준은 조선 말기에 동학농민운동을 이끌었던 인물입니다. 1860년 종교사상가인 최제우가 창시한 민족 종교인 동학은 ‘신분. 빈부, 성별 등에 관계없이 사람은 모두 평등하다’는 사상을 기반으로 해 힘없는 농민들 사이에서 큰 지지를 얻었습니다.흉년으로 백성은 굶주리고 주변 나라는 조선을 손에 넣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어지러운 때, 조병갑이 고부(현 전북 정읍) 군수로 부임하면서 부정부패를 일삼았습니다. 참다못한 전봉준은 1894년 동학교도와 농민을 이끌고 군청을 습격해 관리를 처단하고 창고에 있는 식량을 백성에게 나눠줬습니다. 이것이 바로 동학농민운동의 시작이었던 ‘고부민란 사건’입니다.이후 동학군은 계속해서 부패한 관군과 맞서 싸웠고 전라도 땅 대부분을 차지할 만큼 세력을 키워갔습니다. 그러나 조선은 동학군을 막기 위해 청나라 군사와 일본군을 불러들였고,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 동학농민군은 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순창에 몸을 숨겼던 전봉준도 체포되어 일본군에 의해 서울로 보내진 뒤 1895년 처형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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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rt&History] 헌법의 뿌리 된 대한민국 건국 강령
- [역사 속 그날] 역사 속 이번 주엔 어떤 일이 있었을까? 기록이 뚜렷하게 남아있는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시작으로 근현대까지의 같은 날 있었던 사건들을 한 주 단위로 파악합니다. 이번 주는 11월 17∼23일 발생했던 역사적인 사건들을 살펴보세요.‘대한민국 임시정부 건국강령 초안’. 문화재청 제공1941년 11월 28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한민국 건국 강령’ 발표1919년 4월 중국 상하이에서 조직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5년 해방 전까지 모두 여섯 차례에 걸쳐 국가의 근간(뿌리와 줄기를 이르는 말)이라 할 수 있는 헌법을 만들거나 수정했습니다. 1941년 11월 28일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통과한 ‘대한민국 건국 강령’은 정식 헌법문서는 아닙니다. 해방 이후 헌법 제정에 대비해 장차 독립된 새 국가의 시스템을 어떻게 만들고, 국가 정책을 어떤 방향으로 펼칠 것인지에 대해 정리한 문헌이지요. 국권회복 과정과 그 이후의 건국과정에서 정부가 어떤 정책을 추진해야 할 것인지를 발표했습니다.건국 강령은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사상가였던 조소앙의 ‘삼균주의’에 입각(어떤 사실 등에 근거를 둠)해 작성됐습니다. 삼균주의는 개인과 민족, 국가 간 균등과 정치·경제·교육 균등을 통해 이상사회를 이루자는 이론입니다. 건국 강령은 ‘새로운 민주주의 확립과 사회계급의 타파, 경제적 균등주의의 실현’을 주창했습니다. 건국 강령에 따르면, 국가 건설은 ‘독립 선포→ 정부 수립→ 국토 수복(땅을 되찾음)→ 건국’의 과정으로 이뤄지며 보통 선거를 통한 민주공화국을 수립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건국 강령은 1948년 제정된 제헌헌법의 근간으로 평가받습니다. 조소앙이 국한문 혼용으로 적은 친필 문서인 ‘대한민국 임시정부 건국강령 초안’은 지난해 등록문화재 제740호로 지정됐습니다. 문화재청은 “임시정부가 광복 이후 어떠한 국가를 세우려 했는지 알려주는 유물이자 조소앙이 고심하며 고친 흔적이 남아 있어 더욱 가치가 높다”고 밝혔습니다. [한 뼘 더] 조소앙 선생의 업적은?조소앙 선생(1887∼1958)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주역 중 한 명입니다. 그는 임시정부의 외무부장을 지내기도 했습니다.조소앙 선생은 17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공부하다 1913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해 독립운동에 몸을 바쳤습니다. 1919년 5월 그는 한국의 독립을 세계 각국에 인정받기 위해 파리강화회의에 참석차 김규식, 여운홍과 함께 유럽행에 올라 주목을 받았습니다. 김구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창당하고 ‘삼균주의’를 창시한 인물이기도 합니다.해방 후에는 조국으로 돌아와 대한민국 건국 강령에 따른 건국 운동을 계획했습니다. 그러나 미국, 영국, 중국, 소련(옛날의 러시아) 4개국이 한국을 5년간 신탁통치하기로 결정하자 김구와 함께 반탁시위운동을 주도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조소앙 선생은 제2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기도 했으나 6·25 전쟁 중 납북(북한으로 납치해 감)되어 북한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주한 미군의 장갑차에 여중생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 이후 반미 시위가 열린 모습. 동아일보 자료사진2002년 11월 27일, 미국 대통령, 주한 미군 여중생 사망 사건에 사과2002년 6월 13일 경기 양주시 56번 지방도에서 미 2사단 공병여단 장갑차에 우리나라 여중생 2명이 치여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당시 중학교 2학년이던 신효순 양과 심미선 양은 같은 동네에 사는 친구의 생일잔치에 가기 위해 갓길을 걸어가던 중 사고를 당했습니다.사건을 조사한 미 2사단장은 책임이 운전사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좁은 도로에서 무리하게 장갑차를 몰도록 한 지휘체계에도 있다고 밝혔지만, 운전병과 관제병에 적절한 처벌이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주한미군 지휘협정(SOFA)에 따라 주한미군의 공무수행 중 발생한 사건은 미군이 재판권을 갖도록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미군은 한국에 재판권을 넘기지 않았고 장갑차 운전병과 관제병은 모두 무죄 평결을 받았습니다.미군 측의 편파적인 판결에 분노한 우리 국민들은 장갑차 사건 무죄판결 무효, 불평등한 한미 SOFA 전면 개정 등을 요구하는 반미 시위를 전국적으로 벌였습니다. 시위 열기가 거세지자 조지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은 주한 미국대사를 통해 사과의 뜻을 전했고, 같은 해 12월 13일에는 김대중 당시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깊은 애도와 유감을 전달한다”며 “유사 사건의 재발 방지를 위해 한국 측과 긴밀히 협조할 것”이라며 직접 사과했습니다.조선 제9대 왕 성종의 무덤인 선릉1469년 음력 11월 28일, 성종이 조선 제9대 왕위에 오름조카인 단종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조선 제7대 왕인 세조의 손자였던 성종(1457∼1494)은 예종(조선 제8대왕)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12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습니다. 어린 성종을 대신해 할머니인 정희왕후가 7년 동안 수렴청정(나이 어린 왕이 즉위했을 때 왕대비나 대왕대비가 국정을 대신하던 일)을 했습니다.정희왕후가 물러나고 성종이 직접 정사를 다스리면서 왕권이 안정되기 시작했고, 이 시기에 유교정치의 기틀이 마련됐습니다. 성종은 불교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는 한편 성리학의 발전에 더욱 박차를 가한 왕입니다. 1485년 성종은 세조 때 편찬을 시작한 ‘경국대전’을 완성했습니다. 경국대전은 조선시대 때 나라를 다스리는 기준이 된 최고 법전이지요.성종은 25년간 재위하면서 국정을 안정적으로 운영했으며 조선 개국 이후 추진된 여러 제도를 정비하면서 왕조가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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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rt&History] 일본의 손에 세상 떠난 명성황후
- [역사 속 그날] 역사 속 이번 주엔 어떤 일이 있었을까? 기록이 뚜렷하게 남아있는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시작으로 근현대까지의 같은 날 있었던 사건들을 한 주 단위로 파악합니다. 이번 주는 11월 17∼23일 발생했던 역사적인 사건들을 살펴보세요.명성황후의 국장이 거행되는 모습을 촬영한 사진. 동아일보 자료사진1897년 11월 21·22일, 명성황후 국장 치러져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에 대한 간섭을 확대하며 호시탐탐 침략을 노렸습니다. 이때 러시아와 손을 잡고 일본 세력과 맞서는 명성황후가 일본 입장에서는 눈엣가시였습니다. 실제로 러시아는 프랑스, 독일 등을 끌어들여 일본의 대륙 침략을 막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조선에 러시아와 친한 세력이 많아지는 것이 명성황후 때문이라고 생각한 일본은 황후를 시해(부모나 임금을 죽임)할 계획을 세웠습니다.1895년 10월 8일 총칼로 무장한 군인과 무사들이 경복궁에 침입했고 고종과 명성황후가 지내고 있는 건청궁으로 향했습니다. 미처 몸을 피하지 못한 명성황후는 이들에게 붙잡혀 잔인하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일본은 자신이 저지른 일을 감추기 위해 명성황후의 시신을 불태운 뒤 뒷산에 묻어버리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을미년에 일어난 큰 사건이라는 뜻에서 ‘을미사변’이라고 합니다.명성황후가 세상을 떠났지만 장례식은 곧바로 치러지지 않았습니다. 일본의 공격에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왕세자와 함께 1896년 2월 11일부터 약 1년 간 조선의 왕궁을 떠나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했습니다. 1897년 경운궁으로 돌아온 고종은 국가의 자주독립을 지키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대한제국’을 선포했습니다. ‘황제가 다스리는 한민족의 국가’라는 뜻이지요.이후 고종은 왕비의 지위를 황후로 올렸고 1897년 11월 21일부터 이틀간 비로소 명성황후의 장례식을 치렀습니다.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2년 만에 국장(국비로 치르는 장례)으로 치러진 장례식은 매우 성대하게 열렸습니다. 새로 선포한 대한제국이라는 나라의 위상을 대외적으로 과시하려는 목적도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한 뼘 더] 명성황후는 어떤 인물?16세의 나이에 고종과 혼례를 치르고 왕비가 된 명성황후는 흥선대원군에 맞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졌습니다. 개방정책을 펼친 명성황후는 나라에 어려움이 있을 때 청나라나 러시아에 지원을 요청해 위기를 모면할 줄 아는 외교가였습니다. 명성황후는 서구 세력과 손을 잡아야 한다고 주장해 쇄국(다른 나라와 통상을 금지함)정책을 고집한 흥선대원군과 갈등을 빚기도 했지요. 러시아를 동원해 일본의 간섭을 물리치려고 했던 명성황후는 결국 일본 정부의 지시를 받은 미우라 고로 공사의 지휘 하에 처참하게 시해되고 말았습니다.금모으기 운동에 참여하는 국민들1997년 11월 21일, 임창렬 경제부총리,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 금융 지원 공식 요청1970∼1980년대 우리나라와 동남아시아 국가의 경제는 급속도로 성장하며 발전했습니다. 이 시기에 많은 외국 자본이 한국으로 들어왔지요.하지만 1997년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기 시작하면서 외국 투자자들이 이 나라들에 투자하거나 빌려준 자본을 거두어들이기 시작했는데요. 외국 투자자들은 동남아시아와 인접한 우리나라 경제에도 불안감을 느껴 우리나라에 투자한 자본을 거두어들이기 시작했습니다.외국 자본이 급속도로 빠져나가면서 우리나라의 외화 보유액은 부족해집니다. 외화 보유액은 나라가 급할 때 쓰기 위해 모아둔 달러를 말하지요.외화 보유액이 부족해지고 경제가 어려워지자 우리나라 정부는 1997년 11월 21일 국제통화기금(IMF)에 돈을 빌려달라고 요청했습니다. IMF는 가입한 나라들이 낸 돈을 모아두었다가 경제가 어려운 나라에 이 돈을 빌려주는 역할을 하는 국제금융기구입니다. 돈을 빌린 대가로 약 4년 동안 우리나라는 경제적으로 IMF의 관리를 받게 되었지요.이후 공기업을 민영화하고 부실기업을 정리하는 등 경제 구조를 개편하는 정부의 노력과 금 모으기 운동 등 국민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더해져 2001년 8월 우리나라는 IMF에 빌린 돈을 모두 갚고 외환 위기를 벗어나게 됩니다.금강호 출항 모습1998년 11월 18일, 금강산 관광 유람선 현대 금강호, 동해항서 북한 장전항으로 첫 출항1998년 김대중 정부 시절 남북 교류와 협력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며 본격적으로 우리나라 기업이 북한 관광사업을 개발하기 시작했습니다.1998년 6월 북한과 현대가 금강산 관광사업 계약을 체결하면서 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지요. 현대는 금강산 관광을 위해 매월 1200만 달러(약 140억 원)를 북한에 지불하기로 했습니다. 1998년 11월 18일에는 금강산 관광 유람선인 ‘금강호’가 첫 출항을 하게 됩니다.한동안 인기를 얻었던 금강산 관광은 현대그룹이 관광객 감소로 자금난을 겪으며 대북지불금이 밀리기 시작하면서 2001년 들어 위기를 맞게 됩니다.북한 핵 문제가 불거지면서 정부의 금강산 관광 보조금 정책이 2003년부터 중단되어 금강산 관광객이 다시 감소했고 2008년 7월 남측 관광객이 북한군 초병이 쏜 총에 맞고 목숨을 잃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금강산 관광은 잠정 중단돼 지금에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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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rt&History] 불운의 왕자 이방원, 왕이 되다
- 역사 속 이번 주엔 어떤 일이 있었을까? 기록이 뚜렷하게 남아있는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시작으로 근현대까지의 같은 날 있었던 사건들을 한 주 단위로 파악합니다. 이번 주는 11월 10∼16일 발생했던 역사적인 사건들을 살펴보세요.‘태종대왕 전통 문화행사’에서 임금의 행렬이 재현되고 있는 모습. 동아일보 자료사진태종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울 태종 헌릉 신도비’. 문화재청 제공고려 말, 새로운 나라 건국에 반대하며 ‘단심가’를 읊었던 문신 정몽주를 처단하고 이성계(이후 태조)에게 힘을 실어준 이가 있었으니…. 이성계의 다섯 째 아들 이방원이 그 주인공이지요. 이방원이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살해하면서 이성계를 견제할 세력이 사라졌고 조선 건국은 순조롭게 진행됐습니다. 새 왕조를 여는 데 중요한 고비가 있을 때마다 이방원은 항상 아버지 이성계의 곁을 지켰습니다.조선 건국을 도운 이방원은 내심 자신이 후계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기대와는 다르게 태조는 이방원을 개국공신 선정에서 제외하고, 둘째부인 사이에서 낳은 여덟 째 아들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했습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이방원은 자신을 견제하며 정치에서 소외시켰던 이성계의 충신 정도전을 제거하고 세자인 이방석과 그의 형인 이방번도 죽게 했습니다. 이 사건을 ‘1차 왕자의 난’이라고 합니다.세자를 죽인 후 이방원은 야심대로 바로 왕위에 오를 수는 없었습니다. 권력을 쥐기 위해서 형제를 죽인 것이 알려지면 신하와 백성들의 지지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방원은 우선 형인 이방과(이후 정종)가 아버지인 태조를 이어 왕이 되게 했습니다. 왕위에 오른 정종은 예상대로 정치적 실권을 행사하지 못했습니다. 아우인 이방원이 뒤에서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이죠.이방원의 형인 이방간 역시 왕위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고, 결국 방원과 방간은 서로 칼을 겨누고 싸움을 벌였습니다. 이것이 ‘2차 왕자의 난’이지요. 친형제끼리 싸움을 벌였다는 사실을 안 정종은 화를 내며 이방간을 귀양 보냈습니다. 방간이 사라지자 이방원의 힘은 더욱 커졌고 위협을 느낀 정종은 왕이 된지 불과 2년 만인 1400년 서둘러 방원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습니다.조선 제3대 임금이 된 태종은 형제와 백성의 존경을 받던 신하들을 죽이고 왕위에 오르기는 했으나 나라를 잘 다스리기 위해 노력한 왕입니다. 신문고를 만들어 백성의 억울함을 달랬고 노비를 마음대로 사고 팔 수 없게 하는 등 여러 제도를 고쳐 나라를 안정시켰지요. 태조 때 지은 성균관에서 학생들을 가르쳐 인재를 배출하기도 했습니다.[한 뼘 더] ‘함흥차사’의 유래는?심부름을 갔던 사람이 한참을 아무 소식 없이 돌아오지 않을 때 “함흥차사가 따로 없네?”라고 말하곤 하지요? 함흥차사라는 말은 아버지인 태조 이성계에게 태종 이방원이 용서를 구하는 과정에서 나오게 된 말입니다.형제들끼리 서로 죽이고 다투는 것을 본 태조 이성계는 일찌감치 정종에게 임금 자리를 물려줬습니다. 태종이 왕위에 올랐을 때에 이성계는 서울을 떠나 고향인 함흥에 머물렀지요. 태종은 아버지에게 용서를 빌고 다시 궁궐로 모시기 위해 신하에게 ‘차사’라는 벼슬을 주고 함흥으로 보냈습니다. 이성계는 아들에 대한 실망감과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차사가 오면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모두 활을 쏘아 죽여 버렸습니다. 이때부터 한 번 가면 돌아오지 않는 사람을 가리켜 ‘함흥차사’라고 부르게 됐습니다.2005년 11월 15일 국방부, 실미도 부대원 유해 발굴 작업 개시서울 시내에서 군대와 경찰이 실미도 부대원들이 탄 버스를 포위한 모습인천에서 20㎞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작은 무인도인 실미도. 1968년 당시 중앙정보부는 북한 침투 작전에 투입하고자 특수부대를 만들고 실미도에서 비밀리에 훈련을 이어갔습니다. 정부는 장교 임관이나 미군 부대 취직 등을 약속하며 민간인 젊은이 31명을 모집했습니다. 공작원들은 사회와 격리된 채 3년 여 간 혹독한 훈련을 받아야했습니다. 이들 중 7명은 훈련 중 숨졌습니다. 숨진 7명 중 4명은 탈영(군인이 무단으로 도망침)을 시도하거나 명령을 어겼다는 이유로 살해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가혹한 훈련과 인권 침해에 시달리던 공작원 24명은 1971년 8월 23일 기간병(군대에서 으뜸이 되는 병사) 18명을 살해하고 인천 해안에 상륙한 뒤 시내버스를 빼앗아 서울로 향했습니다. 출동한 군인, 경찰은 총격을 퍼부었고 이 과정에서 실미도 공작원 대부분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당시 박정희 정부는 이 사건을 북한의 소행이라고 발표했습니다.30여 년 간 베일에 싸여있던 사건의 진실은 2003년 영화 ‘실미도’ 등을 통해 대중에 알려졌고, 2005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해 11월에는 실미도 부대원들이 묻힌 것으로 추정되는 서울시립묘지에서 유해 발굴 작업을 벌였고 일부의 유해를 확인했습니다.1945년 11월 12일 동양 척식 주식회사, 신조선회사(이후 신한공사)로 개칭현재 서울 을지로 2가에 위치해 있었던 동양 척식 주식회사일제는 조선의 토지와 자원을 빼앗기 위해 1908년 동양 척식 주식회사를 세웠습니다. 조선을 식민지로 삼은 일제는 토지 조사 사업을 벌였습니다. 일본인 지주가 가진 토지 소유권을 법적으로 보호하고 세금을 잘 걷기 위해서였지요. 조선 정부나 왕실의 농토, 숲, 산지가 조선총독부의 차지가 되었고 총독부는 이 땅을 다시 동양 척식 주식회사에 넘겨 관리하도록 한 것입니다.조선 최대의 지주가 된 동양 척식 주식회사는 농민들에게 땅을 빌려주거나 전국 곳곳에서 직접 농장을 경영했습니다. 땅을 빌린 농민들은 수확의 절반 가까이를 소작료로 지불해야 했습니다. 회사는 조선에 건너온 일본인들이 안정적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땅을 헐값에 팔기도 했습니다. 날로 착취가 심해지자 소작농들은 쟁의를 일으켰고 1926년에는 독립운동가 나석주가 회사에 폭탄을 던지며 우리 민족의 반감을 표하기도 했습니다.해방 후인 1945년 미군정은 일제강점기에 동양 척식 주식회사가 소유한 재산을 인수하고 관리할 기구로 ‘신조선회사’를 세우기에 이릅니다. 이듬해에는 다시 신한공사로 회사의 이름이 바뀌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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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rt&History] 전국으로 확산된 광주학생운동
- [역사 속 그날] 역사 속 이번 주엔 어떤 일이 있었을까? 기록이 뚜렷하게 남아있는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시작으로 근현대까지의 같은 날 있었던 사건들을 한 주 단위로 파악합니다. 이번 주는 11월 3∼9일 발생했던 역사적인 사건들을 살펴보세요.지난해 광주학생운동 89주년을 기념하는 만세 재현 행사가 광주에서 펼쳐지고 있다.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사업회 제공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 발발매년 11월 3일은 ‘학생독립운동기념일’입니다. 이날은 1929년 일제에 항거한 광주학생운동이 발발한 날을 기념하기 위해 제정됐습니다. 1929년 광주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일제강점기인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에서 일본인 중학생이 당시 광주여고보에 재학 중이던 이광춘과 박기옥을 희롱했습니다. 보다 못한 광주고보생들이 일본 학생들과 싸움을 벌였고, 일이 커지자 출동한 일본 경찰은 일본 학생들 편만 들며 조선 학생들을 나무랐습니다. 이 사건은 광주학생운동을 일으킨 도화선이 됐지요.소식을 듣고 화가 난 광주 학생들은 11월 3일 일제의 탄압과 차별교육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습니다. 피해자였던 박기옥도 광주여고보 학생들을 주도해 시위에 참가했습니다. 그날은 일왕 메이지의 생일인 ‘명치절’이었기 때문에 기념행사에 동원된 학생들이 시내에 많았습니다. 행사가 끝나자 학생들은 광주 시내에 모여 항의하는 뜻을 알렸고, 일부 학생들은 나주 사건을 편파적으로 보도한 광주일보사로 몰려가 윤전기(잉크가 묻은 원통형의 판을 종이에 찍어 인쇄하는 기계)에 모래를 뿌리기도 했습니다.시위가 격렬해지자 일제는 시위에 참여한 조선인 학생 수십 명을 체포했습니다. 이후 광주 시내에 있는 모든 중등학교에 휴교령이 내려졌습니다. 학생들의 시위 및 체포 소식은 신간회(1920년대 후반 좌우익 세력이 합작해 결성한 항일단체)에까지 전해졌고 이들은 광주 지역의 학생비밀결사 단체 등과 힘을 모아 전면적인 항일운동을 이어갔습니다. 11월 11일 저녁 독립운동 참여를 독려하는 격문(어떤 일을 알리고 부추기는 글)이 뿌려졌고, 다음날 광주 시내에서 광주고보, 광주농업학교, 광주여고보, 광주사범학교 학생들이 참여하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습니다.격문에서는 일제에 △언론·출판·집회·결사·시위의 자유 보장 △민족 문화와 사회과학 연구의 자유 보장 등 9개 항목을 요구했습니다. 이날 시위로 수백 명의 학생이 일본 경찰에 체포·구금됐습니다. 광주 지역의 시위는 목포, 나주 등 인근 지역으로 퍼져갔고 서울을 비롯한 전국으로 시위가 확산되기에 이르렀습니다.12월 2일 서울의 학생들은 전국의 학생과 민중의 총궐기를 촉구하는 격문을 뿌렸습니다. 서울의 일부 학교 학생들은 동맹휴교를 하며 일제에 저항했습니다. 12월 13일까지 시위가 계속되었고 총 1만2000여 명의 학생들이 참가했다고 합니다. 학생을 중심으로 한 시위는 1930년 3월까지 전국적으로 이어졌습니다.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방문한 학생들. 동아일보 자료사진 1998년 11월 5일, 서대문형무소역사관, 4년 여 복원 공사 후 재개관사적 제324호로 지정된 서울 서대문구에 있는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은 일제강점기 우리 선조들이 겪었던 수난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곳입니다.서대문형무소는 1907년 일본인 건축가 시텐노 가즈마의 설계로 착공되어 이듬해인 1908년 ‘경성감옥’이란 이름으로 문을 열게 됩니다. 일제강점기 때는 주로 민족지도자와 독립운동가들이 투옥됐으며, 1960년 4·19혁명 이후부터 1980년대에는 정치인·기업인·운동권 학생 등이 이곳을 거쳐 갔지요. 서울시는 이곳을 독립운동의 역사교육 현장으로 알리기 위해 옥사와 사형장 등을 원형대로 복원하고 1998년 역사관을 열었습니다.서대문형무소역사관 내부에는 3·1운동 때 유관순 열사가 투옥됐던 지하 여자감옥과 김구·안창호·여운형·한용운 등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투옥되었던 1평 남짓한 좁은 감옥들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김상옥1919년 11월 9일, 김원봉·이종암 등 13명, 길림성에서 의열단 조직1919년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해외로 옮긴 독립운동가들 중 일부는 일제의 무력에 대항할 더 강력한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1919년 11월 9일 밤, 만주 길림성에서 김원봉, 이종암 등 13명의 독립지사들은 민족주의(민족에 기반한 국가 형성을 주장하는 신념) 노선을 지향하는 항일비밀결사인 의열단을 조직하게 됩니다.의열단이라는 이름은 ‘정의(正義)로운 일을 맹렬(猛烈)히 실행한다’는 뜻을 담고 있지요. 당시 만주와 중국 본토에서 조직된 독립운동 단체들이 미온적이고 온건하다고 본 의열단은 직접적 투쟁 방법인 암살과 파괴·폭파 등의 방법을 통해 독립운동을 해나기로 하고 1920년대에 김상옥 등 의열단 단원들은 일본 고위 관료 암살과 관공서 폭파 등의 활동을 이어 나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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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rt&History] ‘평화의 상징’ 된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 [역사 속 그날] 역사 속 이번 주엔 어떤 일이 있었을까? 기록이 뚜렷하게 남아있는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시작으로 근현대까지의 같은 날 있었던 사건들을 한 주 단위로 파악합니다. 이번 주는 10월 27일~11월 2일 발생했던 역사적인 사건들을 살펴보세요.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한국군이 경계 근무를 서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2004년 10월 31일, 한국군,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경비 시작지난 6월 판문점에서 역사적 만남이 이뤄졌습니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판문점에서 사상 첫 남북미 정상 회동을 가졌습니다. 이날 트럼프 대통령은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넘고 북측 땅을 밟은 최초의 현직 미국 대통령이 됐지요.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Joint Security Area)은 6·25 전쟁을 멈추기 위해 만든 공간입니다. 판문점을 특정 건물이라고 알고 있는 경우가 있지만, 군사분계선 상에 설정한 동서 800m, 남북 600m의 직사각형 모양의 구역을 말합니다. 이곳은 공식적으로 남과 북,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습니다.판문점은 원래 초가집 몇 채만 있던 외딴 마을이었지만 1951년 유엔군사령부와 북한 측이 이곳에서 휴전회담을 가지면서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됐습니다.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정전협정이 체결됐고 유엔군사령부와 북한군·중국군은 협정 이행을 위해 이곳을 공동경비구역으로 만들었습니다.1976년부터 판문점에는 높이 15㎝, 폭 50㎝의 콘크리트 경계석(군사분계선·MDL)이 지나게 됐습니다. 이 선 경계로 남과 북이 나뉜 것이지요. 판문점에는 20여 개의 건물이 들어서 있는데 대표적으로 남측에는 자유의 집과 평화의 집이, 북측에는 판문각과 통일각 등이 있습니다.1971년 남북 적십자 예비회담을 계기로 판문점은 남북의 공식·비공식 접촉 및 회담, 왕래의 통로로 활용되어 왔습니다. 정전협정 체결 이후 주한미군이 맡아온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경비 임무는 2004년 한국군으로 넘어왔습니다. 2004년 10월 31일부터 한국군 JSA 부대가 경비를 책임지고 있습니다. 2008년에는 모든 미군이 판문점에서 철수했고 전권이 한국군에 넘겨졌습니다.지난해 4월 27일, 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남북정상회담을 갖고 4·27 판문점 선언을 발표하기도 했지요. 남북이 완전한 한반도 비핵화를 이뤄내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내용이 담겼습니다. 또 남북이 지난해 9월 채택한 9·19 군사합의에 따라 판문점 내의 초소(보초를 서는 장소)와 화기(탄알을 쏘는 병기)를 철수함으로써 비무장화(무기를 갖추지 않음)는 완료했지만, 아직 일반인들의 자유왕래는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지난해 4월 27일 제1차 남북정상회담이 열렸던 남측 평화의 집 전경[한 뼘 더] 자유의 집·평화의 집, 역할은?판문점 남한 지역에 위치한 자유의 집은 4층 규모의 건물로, 남북 간 연락 업무를 담당하기 위해 지어졌습니다. 이곳에는 남북연락사무소와 남북적십자연락사무소 등이 있지요.평화의 집은 주로 남북회담장으로 사용하는 3층짜리 건물입니다. 지난해 4월 제1차 남북정상회담이 열린 의미있는 장소입니다.헌법재판소 내부 전경1987년 10월 29일, 헌법재판소 창설헌법재판소는 법령의 합헌성(법률 등이 헌법의 조항에 부합하는 성질)을 심판하기 위해 설치된 헌법재판기관입니다. 1987년 헌법 개정을 통해 현재의 헌법재판소 제도가 도입되었으며, 1988년 헌법재판소법이 발효되고 재판관 9명이 임명됨으로써 헌법재판소가 설립되었지요.한국의 헌법재판소는 헌법 제6장에 의해 위헌법률심판, 탄핵심판, 정당해산심판, 권한쟁의심판, 헌법소원심판 등 5가지의 헌법재판권한을 행사하며 헌법질서를 수호하고, 국민의 기본적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는 역할을 합니다.헌법재판소는 법관의 자격을 가진 9명의 재판관으로 구성됩니다. 이 중 3명은 국회에서 선출하는 사람을, 다른 3명은 대법원장이 지명하는 사람을 대통령이 임명하며, 나머지 3명은 대통령의 권한으로 지명하게 되지요. 헌법재판소장의 경우 재판관 중에서 대통령이 임명하는데, 국회 인사청문회와 국회의 동의를 얻어야 합니다. 헌법재판소장과 헌법재판소 재판관의 임기는 6년입니다.헌법재판에 필요한 비용은 국가가 부담합니다. 이는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을 침해받고도 재판에서 지면 비용을 내야 한다는 걱정 때문에 헌법재판을 청구하지 못하는 경우가 없도록 하기 위함이지요.야간 개장한 창경궁1909년 11월 1일, 일제, 창경궁에 동물·식물원 설치창경궁의 역사는 성종 13년(1482) 대비전의 세 어른인 세조의 비 정희왕후, 덕종의 비 소혜왕후, 예종의 계비 안순왕후를 모시기 위해 폐허처럼 남아 있던 수강궁 수리를 명하면서 시작됩니다. 1483년 2월부터 짓기 시작해 1484년 9월에 완공되었지요.그러나 1907년 순종 즉위 후 창경궁은 일제에 의하여 크게 훼손되기 시작합니다. 1909년 일제는 궁 안의 전각들을 헐어버리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치하고 궁원을 일본식으로 바꾸었으며 강제로 한일합병조약이 이루어진 이후인 1911년에는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그 이름을 바꾸어 격하(지위를 낮춤) 시켰습니다. 또 창경궁과 종묘를 잇는 산맥을 절단해 도로를 설치하였으며, 궁 안에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벚꽃을 수천 그루 심었지요.광복 이후에도 오랫동안 관광시설로 이용되다가 1980년대에 정부에서 ‘창경궁 복원 계획’을 세우고 명칭도 원래의 창경궁으로 바꾸게 됩니다. 1984년부터 1986년 8월까지 동물원과 식물원 시설 및 일본식 건물을 철거하고 문정전 등을 복원했으며 벚꽃나무도 소나무·느티나무·단풍나무 등으로 교체해 한국 전통의 궁궐 모습을 되찾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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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rt&History] 빛나는 승리 거둔 독립군
- [역사 속 그날] 역사 속 이번 주엔 어떤 일이 있었을까? 기록이 뚜렷하게 남아있는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시작으로 근현대까지의 같은 날 있었던 사건들을 한 주 단위로 파악합니다. 이번 주는 10월 20∼26일 발생했던 역사적인 사건들을 살펴보세요.중국 청산리에 있는 청산리항일대첩기념비. 동아일보 자료사진1920년 10월 21일, 독립군이 청산리 전투에서 승리함1910년 일본에 의해 강제로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된 이후, 의병들은 만주의 북간도와 서간도, 러시아 연해주 등으로 이주해 독립군으로 활동했습니다.1910년대에 독립군을 양성하고 기지를 건설하는 기간을 거쳐 1920년대부터 무장(전투 장비를 갖춤) 독립운동이 활발해졌습니다. 1915년에는 총사령은 박상진, 부사령은 김좌진으로 하는 군대식 조직인 대한광복회가 대구에서 창설됐습니다. 이들은 전국 8도에 지부를 두고 군자금을 모으고 독립군을 양성하는 등 항일 투쟁을 벌였지요.1919년 3·1 독립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세워지면서 독립에 대한 열망은 날로 뜨거워졌습니다. 만주 지역에서 독립군의 무장 항쟁도 활발해졌지요. 1920년 6월 만주 봉오동 (현재 중국 지린성 봉오동)에서 독립군의 연합부대와 일본군이 벌인 전투에서 홍범도가 이끈 대한독립군 등이 일본을 격파하고 큰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봉오동 전투’는 만주에서 한국 독립군과 일본군 사이에 벌어진 최초의 대규모 전투였습니다. 이 전투에서 승리하며 독립군의 사기가 크게 높아졌습니다.독립군의 활약에 위협을 느낀 일본은 간도 지방의 독립군을 처단할 방법을 모색했습니다. 일본은 중국의 마적단(말을 타고 떼를 지어 다니는 도둑)에게 일본 영사관을 공격하도록 했습니다. 마적단 토벌을 핑계 삼아 독립군 공격을 시작하려는 속셈이었지요. 일본은 무려 2만5000명의 군사를 출동시켰고 이를 알고 피신하던 독립군과 만주 청산리에서 만나게 됩니다.김좌진이 이끌었던 북로군정서 부대는 백운평 골짜기에 진을 치고 숨은 뒤 일본군이 들어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일본군이 도착하자 기습적으로 공격을 퍼부었고 물러나는 길이 좁아 우왕좌왕하던 일본군은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후 청산리 일대에서 크고 작은 전투가 연이어 벌어졌습니다. 약 일주일간 이어진 전투에서 독립군은 일본군에 맞서 용감하게 싸웠고 대부분 전투에서 승리하게 됩니다. 독립군은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 새벽까지 10여 차례 전투를 벌인 끝에 일본군 1200명을 해치웠습니다.독립군을 이끈 김좌진 장군[한 뼘 더] 김좌진 장군의 업적은?1915년 대한광복회에 가입하며 무장 항일운동을 시작한 김좌진 장군(1889∼1930)은 1918년 일본의 감시를 피해 만주로 건너갔습니다.1919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권고를 받아들여 북로군정서의 총사령관이 되어 1600명의 독립군을 지휘했습니다. 독립군 양성을 위한 사관연성소를 설치하고 소장을 지내며 1920년 9월에는 제1회 졸업생 298명을 배출시키기도 했지요. 1920년 10월에는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끌었고 이후 약 10년 간 본격적인 항일전투를 전개했습니다.김 장군은 만주에서 무장투쟁을 이어가면서도 국내에 밀사와 공작대를 꾸준히 파견했습니다. 독립을 이루기 위해서는 궁극적으로 국내로 진출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 급속하게 퍼지던 공산주의 사상에 강력하게 반대했던 그는 공산주의자들과 대립했고, 결국 1930년 고려공산당 회원인 한 청년의 총에 맞고 세상을 떠났습니다.박정희 기념관에서 사람들이 전시물을 살펴보는 모습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사망에 전국(제주도 제외) 비상 계엄 공포박정희 전 대통령은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오래 대통령을 지낸 인물입니다. 1963년 5대 대통령에 취임하고 장기집권을 위한 3선 개헌을 통해 1979년까지 재임했지요.군인이었던 그는 1961년 제2군 부사령관으로 재임하던 중 5·16 군사정변을 주도했고 1962년 윤보선 대통령이 사임하자 대통령권한대행을 맡게 됩니다. 1963년 민주공화당에 입당해 총재가 되었고 그해 12월 제5대 대통령에 취임했지요.그는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통한 경제 성장과 사회 인프라 확충에 힘을 쏟았습니다. 여론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일협정에 정식 서명하고 베트남 전쟁에 파병하며 외국자본을 모으기도 했지요.그러나 장기집권에 대해 국민들의 불만이 커지고 민주화운동으로 지지도가 떨어지자 박정희 대통령은 ‘긴급조치’를 발동해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학생들을 탄압했습니다. 이에 대한 불만이 날로 높아지던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전 대통령은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의 저격으로 서거(세상을 떠남)하게 됩니다.태조 이성계의 어진. 국립중앙박물관 제공1394년 음력 10월 25일, 태조 이성계, 한양으로 수도를 옮김조선 1대 왕인 이성계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최고 의사결정기관인 도평의사사에 한양(지금의 서울)으로의 천도(수도를 옮김)를 명했습니다.한양천도에는 정치적, 사회적 혼란기마다 언급되었던 풍수지리설이 큰 영향을 미쳤지요. 개성의 지덕(地德·땅의 좋은 기운)이 이미 다했기 때문에 다른 곳으로 수도를 옮겨야 한다는 논리로, 이에 한양이 주요 후보지로 거론되었습니다.하지만 한양을 도읍지로 선택한 실질적인 요인은 한양이 갖추고 있는 인문·지리적 조건이 좋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한양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서쪽에는 바다, 남쪽으로는 한강이 흐르고 있어 무엇보다 군사적인 방어에 유리했지요. 또한 곡식 같은 세금을 거두는 데에 주로 육로보단 수로를 이용했던 때이므로 한양은 서해의 바다를 이용하기에도 좋은 곳이었습니다.1394년 10월, 드디어 조선왕조는 새 도읍지인 한양으로 천도하게 됩니다. 이를 시작으로 서울은 본격적으로 한반도의 정치적, 경제적 중심으로 성장하게 되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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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rt&History] 진실 밝혀진 제주 4·3 사건
-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입니다. 기나긴 역사를 간직한 우리나라에선 과거에 어떤 중대한 사건들이 있었을까요? 매주 월요일 선보이는 ‘역사 속 그날’ 코너를 통해 역사 지식을 쑥쑥 키워보세요. 역사 속 이번 주엔 어떤 일이 있었을까? 기록이 뚜렷하게 남아있는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시작으로 근현대까지의 같은 날 있었던 사건들을 한 주 단위로 파악합니다. 이번 주는 10월 13∼19일 발생했던 역사적인 사건들을 살펴보세요.제주도 사람들에게 1945년 광복은 특별했습니다. 제주도가 지리적으로 동북아시아의 요충지인 까닭에 일본군은 곳곳에 비행장을 만들고 폭격에 대비해 굴을 파며 섬을 훼손시켰습니다. 이 과정에서 주민들은 강제로 동원되어 공사를 해야 했지요. 공사에 나섰다가 목숨을 잃은 사람도 많았습니다. 바라던 광복의 기쁨도 잠시 1948년 미국과 이승만 당시 대통령은 남한 단독 총선거를 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통일 정부가 수립되길 원했던 제주도 사람들은 남한만의 단독 선거를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습니다. 경찰과 군인들은 시위를 벌이는 제주도 사람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았고 닥치는 대로 잡아가 고문했습니다. 1948년 4월 3일 참다못한 제주도 사람들은 한 마음이 되어 미군 철수와 단독 선거 반대를 주장하며 들고 일어났습니다. 경찰과 군은 무기가 없는 사람들에게까지도 총을 쏘며 강하게 진압했습니다.제주 4·3 평화공원 기념관 내 희생자들의 사진이 전시된 터널. 동아일보 자료사진평화공원 내 제주 지역 행방불명 희생자들의 표석주민들은 한라산으로 들어가 숨었지만 군인들이 쫓아와 산간 마을을 불태우고 보이는 대로 사람들을 죽게 했습니다. 결국 1948년 11월 17일, 제주 전역에 계엄령(비상시에 헌법 일부 효력을 중지하고 군사권을 발동하는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 선포됐습니다. 군인들이 끊임없이 무고한 주민들을 집단으로 살상한 끝에 마을 자체가 없어져버리기도 했습니다. 이후 일부 무장대원만이 한라산에 남아 투쟁을 이어갔습니다. 1954년 9월 21일 무장대원을 완전히 토벌(무력으로 응징함)한 정부가 한라산 입산 금지 조치를 해제하면서 제주 4·3 사건은 끝이 났습니다.제주 4·3 사건은 오랫동안 진실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아 피해 규모도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1980년 후반부터 이 사건을 밝히려는 사람들의 노력으로 조사가 이뤄졌고 1990년대 후반부터는 정부 차원의 진상 규명 작업이 진행됐습니다. 1999년 ‘제주 4·3 사건 진상 규명 및 피해자 명예 회복을 위한 특별법’이 국회에서 통과되며 2003년 10월 15일에는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보고서가 확정됐습니다.제주 4·3 특별법은 제주 4·3 사건을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 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과 그 진압 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2014년에는 4월 3일을 국가추념일로 지정하기도 했습니다. 정부가 확인을 거친 4·3 사건 관련 희생자는 1만4363명, 유족은 6만4378명입니다. [한 뼘 더] 제주도 다크 투어리즘이란?‘제주도’ 하면 무엇이 떠오르나요? 유채꽃이 아름답게 핀 들판, 시원한 바람, 물질하는 해녀….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감상하는 것도 좋지만 제주 4·3 사건 현장 등을 둘러보는 ‘다크 투어리즘’을 떠나는 것을 추천합니다. 다크 투어리즘은 잔혹한 참상이 발생한 역사적 장소나 현장을 둘러보는 여행을 말합니다.비영리단체 ‘제주다크투어’는 제주 4·3 사건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게 제주 4·3 평화공원을 방문해 깊이 있는 해설을 들으며 사건에 대해 이해할 것을 권합니다. 사건 당시 주민들이 숨어 살았던 자연동굴인 선흘 토틀굴에 방문해 어떻게 생활했을지 돌아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요. 4·3 사건으로 가장 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마을인 북촌 너븐숭이 4·3기념관도 있습니다.2006년 10월 14일 반기문, 제8대 유엔 사무총장에 선출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선출된 후 한국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새로운 세기 유엔(UN·국제연합)의 역할은 새로운 도전 속에서 인도주의가 더욱 증진될 수 있도록 국가 간 시스템을 강화하는 것입니다.”2006년 10월 14일 제8대 유엔 사무총장으로 공식 선출된 반기문 당시 외교통상부 장관은 수락연설을 통해 이렇게 밝혔습니다. 그는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유엔 사무총장으로 선출됐습니다. 아시아인으로는 미얀마 출신의 우 탄트 제3대 사무총장에 이어 두 번째였지요.반 전 사무총장의 연임 추천 결의안이 2011년 6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만장일치로 통과되면서 2016년 12월 31일까지 유엔 사무총장을 지냈습니다. 약 10년간 사무총장으로 재임하면서 그가 남긴 최대 업적은 ‘파리기후협정’을 채택시킨 것입니다. 2015년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1)에 참가한 195개국은 ‘지구의 평균 온도가 산업화 이전보다 1.5도 이상 오르지 않도록 노력한다’는 것에 합의했습니다. 지구온난화 속도를 늦추기 위해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여야 한다는 데 뜻을 같이 한 것이지요.1884년 음력 10월 17일 김옥균·박영효, 갑신정변 일으킴갑신정변이 일어난 우정총국의 전경. 문화재청 제공고종 때(조선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 제1대 황제)인 1882년, 나라가 신식 군대를 우대하는 것에 분노한 구식 군대는 참다못해 관리들의 집에 불을 지르고 일본 관리들을 죽이는 난을 일으켰습니다. 이것이 바로 ‘임오군란’.임오군란을 겪은 이후 개화파는 왕비를 포함한 민씨 일가와 협력해 개혁을 단계적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한 온건 개화파와 청나라에 대한 사대관계를 청산하고 조선의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추진하려고 한 급진 개화파로 나뉘게 됐습니다.김옥균, 박영효 같은 양반 출신 지식인들은 우정국 개국 축하연이 있는 날을 틈타 정변을 일으켰습니다. 김옥균은 창덕궁으로 가 청이 난을 일으켰다고 거짓말을 하고 고종과 왕후 민씨를 경우궁으로 피신시켰습니다. 이 사이 정변을 일으켜 새로운 정부를 수립한 개화당은 근대적 개혁을 펼칠 준비를 마쳤습니다. 사태를 파악한 청군이 갑신정변 세력을 처단하려 했고, 약속과 달리 일본이 이들을 돕지 않아 계획은 수포(물거품)로 돌아갔습니다. 이들이 만든 개혁 정강 14개조에는 신분제를 없애고 탐관오리를 처벌하라는 등의 내용이 담겼습니다. 백성의 지지를 이끌어내지는 못했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정치 개혁 시도였다는 점에서 갑신정변은 그 의미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