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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rt&History] 일본의 손에 세상 떠난 명성황후
  • 장진희 기자, 이지현 기자
  • 2019-11-17 15: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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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년 11월 21·22일, 명성황후 국장 치러져

[역사 속 그날] 역사 속 이번 주엔 어떤 일이 있었을까? 기록이 뚜렷하게 남아있는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시작으로 근현대까지의 같은 날 있었던 사건들을 한 주 단위로 파악합니다. 이번 주는 11월 17∼23일 발생했던 역사적인 사건들을 살펴보세요.


명성황후의 국장이 거행되는 모습을 촬영한 사진. 동아일보 자료사진

1897년 11월 21·22일, 명성황후 국장 치러져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에 대한 간섭을 확대하며 호시탐탐 침략을 노렸습니다. 이때 러시아와 손을 잡고 일본 세력과 맞서는 명성황후가 일본 입장에서는 눈엣가시였습니다. 실제로 러시아는 프랑스, 독일 등을 끌어들여 일본의 대륙 침략을 막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조선에 러시아와 친한 세력이 많아지는 것이 명성황후 때문이라고 생각한 일본은 황후를 시해(부모나 임금을 죽임)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1895년 10월 8일 총칼로 무장한 군인과 무사들이 경복궁에 침입했고 고종과 명성황후가 지내고 있는 건청궁으로 향했습니다. 미처 몸을 피하지 못한 명성황후는 이들에게 붙잡혀 잔인하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일본은 자신이 저지른 일을 감추기 위해 명성황후의 시신을 불태운 뒤 뒷산에 묻어버리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을미년에 일어난 큰 사건이라는 뜻에서 ‘을미사변’이라고 합니다.

명성황후가 세상을 떠났지만 장례식은 곧바로 치러지지 않았습니다. 일본의 공격에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왕세자와 함께 1896년 2월 11일부터 약 1년 간 조선의 왕궁을 떠나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했습니다. 1897년 경운궁으로 돌아온 고종은 국가의 자주독립을 지키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대한제국’을 선포했습니다. ‘황제가 다스리는 한민족의 국가’라는 뜻이지요.

이후 고종은 왕비의 지위를 황후로 올렸고 1897년 11월 21일부터 이틀간 비로소 명성황후의 장례식을 치렀습니다.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2년 만에 국장(국비로 치르는 장례)으로 치러진 장례식은 매우 성대하게 열렸습니다. 새로 선포한 대한제국이라는 나라의 위상을 대외적으로 과시하려는 목적도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한 뼘 더] 명성황후는 어떤 인물?

16세의 나이에 고종과 혼례를 치르고 왕비가 된 명성황후는 흥선대원군에 맞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졌습니다. 개방정책을 펼친 명성황후는 나라에 어려움이 있을 때 청나라나 러시아에 지원을 요청해 위기를 모면할 줄 아는 외교가였습니다. 명성황후는 서구 세력과 손을 잡아야 한다고 주장해 쇄국(다른 나라와 통상을 금지함)정책을 고집한 흥선대원군과 갈등을 빚기도 했지요. 러시아를 동원해 일본의 간섭을 물리치려고 했던 명성황후는 결국 일본 정부의 지시를 받은 미우라 고로 공사의 지휘 하에 처참하게 시해되고 말았습니다.


금모으기 운동에 참여하는 국민들

1997년 11월 21일, 임창렬 경제부총리,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 금융 지원 공식 요청​

1970∼1980년대 우리나라와 동남아시아 국가의 경제는 급속도로 성장하며 발전했습니다. 이 시기에 많은 외국 자본이 한국으로 들어왔지요.

하지만 1997년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기 시작하면서 외국 투자자들이 이 나라들에 투자하거나 빌려준 자본을 거두어들이기 시작했는데요. 외국 투자자들은 동남아시아와 인접한 우리나라 경제에도 불안감을 느껴 우리나라에 투자한 자본을 거두어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외국 자본이 급속도로 빠져나가면서 우리나라의 외화 보유액은 부족해집니다. 외화 보유액은 나라가 급할 때 쓰기 위해 모아둔 달러를 말하지요.

외화 보유액이 부족해지고 경제가 어려워지자 우리나라 정부는 1997년 11월 21일 국제통화기금(IMF)에 돈을 빌려달라고 요청했습니다. IMF는 가입한 나라들이 낸 돈을 모아두었다가 경제가 어려운 나라에 이 돈을 빌려주는 역할을 하는 국제금융기구입니다. 돈을 빌린 대가로 약 4년 동안 우리나라는 경제적으로 IMF의 관리를 받게 되었지요.

이후 공기업을 민영화하고 부실기업을 정리하는 등 경제 구조를 개편하는 정부의 노력과 금 모으기 운동 등 국민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더해져 2001년 8월 우리나라는 IMF에 빌린 돈을 모두 갚고 외환 위기를 벗어나게 됩니다.


금강호 출항 모습

1998년 11월 18일, 금강산 관광 유람선 현대 금강호, 동해항서 북한 장전항으로 첫 출항​

1998년 김대중 정부 시절 남북 교류와 협력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며 본격적으로 우리나라 기업이 북한 관광사업을 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1998년 6월 북한과 현대가 금강산 관광사업 계약을 체결하면서 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지요. 현대는 금강산 관광을 위해 매월 1200만 달러(약 140억 원)를 북한에 지불하기로 했습니다. 1998년 11월 18일에는 금강산 관광 유람선인 ‘금강호’가 첫 출항을 하게 됩니다.

한동안 인기를 얻었던 금강산 관광은 현대그룹이 관광객 감소로 자금난을 겪으며 대북지불금이 밀리기 시작하면서 2001년 들어 위기를 맞게 됩니다.

북한 핵 문제가 불거지면서 정부의 금강산 관광 보조금 정책이 2003년부터 중단되어 금강산 관광객이 다시 감소했고 2008년 7월 남측 관광객이 북한군 초병이 쏜 총에 맞고 목숨을 잃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금강산 관광은 잠정 중단돼 지금에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어린이동아 장진희 기자 cjh0629@donga.com, 이지현 기자 easy2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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