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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눈높이 사설] [눈높이 사설]마지막 황태자
  • 어린이동아 취재팀
  • 2015-05-06 00: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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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1988년 미국 최대의 영화 시상식인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등 9개 부문 상을 거머쥔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마지막 황제(1987년 작)’는 중국의 마지막 황제인 푸이(1906∼1967)의 삶을 다뤘다.

 

1908년 두 살배기 황제로 등극한 푸이는 청의 멸망으로 여섯 살에 쯔진청(중국 베이징에 있는 명·청나라 때의 궁전)에 갇혀 살게 된다. 훗날 만주로 옮겨간 푸이는 1934년 일제가 침략의 발판으로 세운 꼭두각시 정권(겉으로는 독립된 국가이나 실제로는 남의 나라의 지배를 받는 정권)인 만주국의 황제에 올랐다가 일본이 진 후 전범(전쟁범죄인) 신세가 됐다.

 

1940년 7월 푸이가 일본을 방문할 때 영접(손님을 만나 대접하는 일)을 나간 사람이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1897∼1970)이었다. 역사의 소용돌이에 휩쓸린 비운의 황제와 황태자, 몰락한 왕조의 두 후예가 만나는 장면을 일제가 연출한 것이다.

 

영친왕 이은은 고종의 일곱 번째 아들이자 순종의 이복동생(아버지는 같고 어머니가 다른 동생)이다. 만 열 살 때 황태자로 올려졌으나 *이토 히로부미(1841∼1909)의 건의에 따라 그해 12월 일본으로 끌려갔다. 명분은 유학이었으나 실제로는 강제로 일본에 끌려간 것이다.

 

영친왕과 영친왕비의 한 많은 생이 묻힌 황태자와 황태자비의 무덤. 경기 남양주시 홍유릉 경내에 자리한 무덤이 5월 10일부터 일반에 처음 개방된다. 어린 나이에 부모 품을 떠난 영친왕은 일본 왕족 마사코(한국 이름 이방자·1901∼1989)와 정략결혼을 했다. 우리 왕실을 일본 왕실에 편입하려는 일본의 정책에 따른 것이다.

 

조선 왕조와 대한제국 최후의 한 페이지를 살다 간 영친왕은 일제로 인해 꼬일 대로 꼬인 삶을 살았다. 일본이 전쟁에서 진 후 왕족 지위를 박탈당했으며 한일 두 나라에서 국적을 인정받지 못하고 무국적자(어떤 나라의 국적도 가지지 않은 사람)로 살기도 했다.

 

광복 후에도 ‘조선 황실을 인정할 수 없다’는 이승만 정부의 방침에 따라 고국 땅을 밟을 수 없었다. 1963년 뇌출혈 상태로 귀국했으나 숨을 거둘 때까지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비운의 역사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굴곡진 삶. 자신이 기억하는 역사와 다른 역사를 이야기하는 아베 신조 총리를 보며 무덤 속에서 마지막 황태자는 무슨 생각을 할까.

 

※ 상식UP

 

이토 히로부미: 일본의 정치가. 일본이 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침략하고 식민지배하는 데 앞장섰으며 대한제국(1897∼1910년 우리나라의 이름)의 외교권을 일제가 빼앗는 조약인 을사늑약을 강요한 인물.

 

동아일보 4월 30일자 고미석 논설위원 칼럼

어린이동아 취재팀 kid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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