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렁이가 땅에서 기어다니고 있다. 위키피디아 제공

어린이동아 독자들, 지하(‘지렁이 하이’의 줄임말)!

비가 온 다음 날이면 땅에서 기어 다니는 나를 본 적이 있겠지? 나야 나, 지렁이라고.

꿈틀꿈틀 움직이는 모습이 징그럽다고 생각한 어린이도 있겠지만 내가 싼 똥이 땅을 얼마나 기름지게 하는지 아니? 음식물 쓰레기, 낙엽, 심지어는 작은 돌까지도 먹어치운 뒤 잘게 분해할 수 있어. 내가 똥을 싸면 쌀수록 흙은 부드러워지고 건강한 미생물도 많아져. 그야말로 지구의 청소부랄까. ‘진화론’을 쓴 찰스 다윈(1809∼1882) 할아버지도 이런 점에 매료돼 지렁이의 생태에 대해 40년 넘게 연구했다고!

아차차. 내 자랑을 하려던 건 아냐. 최근에 너무너무 억울한 일이 생겨서 그래. 지렁이가 인간이 버린 플라스틱을 잘게 분해해 ‘나노 플라스틱’으로 만든다는 연구결과가 나왔어. 내가 땅을 오염시키고 있다니…. 이제껏 해왔던 대로 땅 속을 돌아다니면서 이것저것 먹고 똥을 싼 것뿐이야. 만능일꾼이었던 내가 천덕꾸러기 신세가 된 사연을 들어줄래?


‘진화론’을 입증한 영국의 생물학자 찰스 다윈

땅을 숨 쉬게 하는 지렁이

“하등한 생물 중에서 이렇게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동물이 또 있을까.”

생물이 진화한다는 진화론을 규명한 영국의 생물학자 다윈 할아버지는 생전 지렁이에 대해 이렇게 극찬했어. 다윈이 숨지기 전 마지막까지 연구한 게 지렁이의 생태라는 거 아니? 그는 사망 1년 전인 1881년 ‘지렁이의 작용에 의한 부식토의 형성’이라는 책을 발표했어.

이 책에서 다윈은 지렁이가 흙을 순환시킨다고 밝혔어. 지렁이는 집을 짓기 위해 두더지처럼 땅속을 들쑤시고 다녀. 지렁이가 지나간 곳에는 공기가 잘 통해서 식물이 숨을 쉬고 물을 흡수하기 좋은 땅이 되지. 농부들이 씨앗을 뿌리기 전에 쟁기로 밭을 갈잖아? 지렁이가 땅속에서 그런 역할을 하는 거야.

지렁이는 식물의 잎이나 동물의 배설물 같은 유기물(생명력에 의해 만들어지는 물질)을 즐겨 먹지. 배설물이나 낙엽 자체가 거름이 되긴 어려워. 나 같은 토양 생물이 유기물을 잘게 분해해야 땅에 흡수되기 좋은 영양분이 되는 거야. 뿐만 아니지. 내가 매일 만들어내는 배설물에는 질소, 탄소, 칼슘, 마그네슘 같은 이로운 물질이 포함돼 있어. 오죽하면 내가 싼 똥을 ‘분변토(지렁이 배설물로 만든 천연 비료)’라고 부르겠어?​


지렁이가 미세 플라스틱을 먹고 나노 플라스틱을 배출하는 모습. 오른쪽 가운데는 연구진이 전자현미경으로 관찰한 지렁이 배설물 속 나노 플라스틱. 한국연구재단 제공​

지렁이는 무죄, 쓰레기는 유죄!

이게 다 사람들이 버린 플라스틱 쓰레기 때문이야! 지렁이가 흙 속에서 미세 플라스틱을 분해해 미세 플라스틱의 5만분의 1 크기에 불과한 나노 플라스틱으로 배출한다는 연구결과가 발표되면서 내가 더 이상 이로운 벌레가 아니라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을 것 같아 걱정돼.

얼굴 전용 세제나 치약에 들어있는 작은 알갱이, 공업용 연마제를 만들 때 5㎜ 이하의 미세 플라스틱이 쓰여. 플라스틱 쓰레기가 잘게 분해돼 미세 플라스틱이 되기도 하지. 문제는 크기가 아주 작기 때문에 플라스틱이 음식에 포함돼 사람 몸속에 쌓일 수 있다는 거야. 미세 플라스틱이 인체에 들어가면 독성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경고가 나와. 얼마나 안 좋은지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해.

한국연구재단에 따르면 안윤주 건국대 환경보건과학과 교수팀이 지렁이가 미세 플라스틱이 포함된 흙을 먹고 배출하는 과정에서 나노 플라스틱이 만들어진다는 연구결과를 최근 발표했어. 연구진은 미세 플라스틱에 오염된 토양에서 3주간 기른 지렁이의 배설물을 전자현미경으로 관찰했지. 그 결과 미세 플라스틱보다 작은 나노 플라스틱이 발견됐어.

다행히도 연구진은 내 탓을 하진 않았어. 흙을 먹고 배설물을 싸는 게 지렁이의 잘못은 아니잖아? 단 플라스틱과 미세 플라스틱 사용을 자제할 필요가 있다고 경고했지. 더불어 나노 플라스틱으로 오염된 땅이 생태계에 얼마나 부정적 영향을 끼치는 지도 추가적으로 연구해야 한다고 밝혔어. 일회용품 사용 자체를 줄이고, 재활용률을 높일 수 있도록 플라스틱 쓰레기는 깨끗이 씻어서 배출하도록 노력하자, 제발∼!​

▶어린이동아 장진희 기자 cjh062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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