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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의 뉴스] 을미사변 당시 일본 외교관 편지 발견 “우리가 명성황후 죽였다”
  • 권세희 기자
  • 2021-11-17 13:2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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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영사관의 보조로 머물던 외교관 호리구치 구마이치가 쓴 것으로 추정되는 편지 중 일부. 아사히신문 홈페이지 캡처


호리구치 구마이치가 쓴 것으로 추정되는 편지 8통

1895년 10월 8일, 고종(조선의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제1대 황제)의 비인 명성황후(1851∼1895)를 암살한 사건에 가담(같은 편이 돼 일을 함께 함)한 일본 외교관이 고향 친구에게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편지가 최근 발견됐다. 발견된 편지에는 “우리가 직접 명성황후를 죽였다”는 내용 등 당시 명성황후의 시해(윗사람을 죽임) 상황이 자세하게 담겨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 아사히신문은 일본의 군인, 외교관 등이 경복궁을 기습해 명성황후를 시해한 사건인 ‘을미사변’ 당시 조선에 설치된 일본 영사관의 보조로 머물던 외교관 호리구치 구마이치가 쓴 것으로 추정되는 편지 8통을 발견했다고 지난 16일(현지시간) 보도했다.

호리구치는 1894년 11월 17일부터 1895년 10월 18일까지 고향 친구인 다케이시 데이쇼에게 총 8통의 편지를 보냈다. 이 가운데 명성황후 시해 다음날인 1895년 10월 9일 자에 보낸 편지에서 명성황후 시해 당시의 상황이 상세히 기록됐다. 호리구치는 “진입은 내가 맡은 임무였다. 담을 넘어 (중략) 간신히 오쿠고텐(귀족 집의 안쪽에 있는 건물, 침소)에서 왕비를 시해했다. 생각보다 간단해 오히려 놀랐다”라고 밝혔다.

이 편지는 일본의 나고야에 거주하는 우표 연구가인 일본계 미국인이 고물상에서 발견했다. 붓으로 흘려 쓴 이 편지는 이후 ‘조선 왕비 살해와 일본인’의 저자 김문자 재일 역사학자가 진품(진짜인 물품)이라고 판독했다. 김문자 역사학자는 “편지가 원래 보관됐던 장소나 기록된 내용, 편지를 봉인한 방법 등을 따졌을 때 진품으로 보인다”면서 “불명확한 점이 많은 사건을 해명하는 열쇠가 될 귀중한 자료”라고 밝혔다.

이번에 발견된 편지는 을미사변에 일본이 국가 차원의 개입을 했음을 밝히는 증거가 될 수 있어 주목받는다.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는 “을미사변에 대해 일본은 국가의 개입 없이 일본의 낭인(일정한 직업이 없는 사람)이나 민간인이 도움을 준 것이라는 입장을 강조해왔다”면서 “그러나 당시 외교관이 을미사변 현장에 동행한 것을 진술하는 형태로 쓴 이 편지의 발견은 일본이 국가 차원에서 을미사변에 개입했음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될 수도 있다”고 밝혔다.

[한 뼘 더] 을미사변 이후 아관파천, 그리고 ‘고종의 길’

을미사변 이후 위협을 느낀 고종이 1896년 2월 11일부터 약 1년간 조선 왕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른 사건을 ‘아관파천’이라고 해요. 아관파천 때 고종이 피신한 것으로 추정되는 길은 오랫동안 잠겨있었는데요. 2018년, 이 길이 열려 일반에 개방됐어요. 서울 종로구 덕수궁 돌담길에서 정동공원과 러시아 공사관까지 이어지는 120m에 이르는 이 길은 ‘고종의 길’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어린이동아 권세희 기자 ksh071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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