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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rt&History] 거란군 크게 무찌른 강감찬 장군
  • 장진희 기자
  • 2019-12-08 14:3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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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그날] 역사 속 이번 주엔 어떤 일이 있었을까? 기록이 뚜렷하게 남아있는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시작으로 근현대까지의 같은 날 있었던 사건들을 한 주 단위로 파악합니다. 이번 주는 12월 8∼14일 발생했던 역사적인 사건들을 살펴보세요.


경기 수원시 광교공원에 있는 강감찬 장군 동상. 동아일보 자료사진


1018년 음력 12월 10일, 강감찬, 거란의 소배압에게 맞서 대승을 거둠

지금의 중국 땅에 위치한 나라였던 거란은 10세기 말부터 11세기 초까지 세 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공했습니다. 중국 전역으로 세력을 넓히고자 했던 거란은 송나라와 친한 고려가 탐탁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993년 거란의 장수 소손녕이 80만의 군대를 이끌고 고려로 내려왔습니다. 고려의 문신이었던 서희는 뛰어난 외교술을 발휘해 소손녕과 담판을 벌였습니다. 송나라와 관계를 끊고 거란을 적으로 삼지 않겠다고 안심시켜 소손녕 군대를 철수시킨 뒤 거란으로 가는 길목인 압록강 부근의 땅까지 얻어냈습니다. 그리고 고려는 이 지역에 ‘강동 6주’를 설치했지요.

뒤늦게 압록강 지역이 요지였다는 것을 깨달은 거란은 1010년 다시 고려에 쳐들어왔습니다. 거란군은 고려의 수도인 개경을 정복하기도 했지만 확실한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고려군과 대치했습니다. 군대를 철수시키면 고려왕이 직접 거란에 가서 예를 올리겠다는 제안을 받고나서야 물러났습니다. 이때 고려는 돌아가는 거란군을 곳곳에서 공격해 큰 타격을 입혔지요. 고려는 예를 올리겠다는 약속도 지키지 않고, 강동 6주를 돌려주지도 않았습니다.

화가 난 거란은 1018년 세 번째로 고려에 침입했습니다. 거란의 장군 소배압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략했고 70대 노장이었던 강감찬 장군이 그에 맞서 싸웠습니다. 강감찬은 평안북도 흥화진에 기병 1만2000명을 배치하고 흥화진 앞에 흐르던 강물을 막았다가 거란군이 건너갈 때 터뜨리는 전술을 펼쳤습니다. 흥화진에서 예상치 못하게 큰 피해를 입은 소배압은 물러서지 않고 개경으로 나아갔습니다. 개경 진입을 코앞에 두고 기습부대의 공격을 받은 거란군은 싸울 의지를 잃고 철수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강감찬은 돌아가는 거란군을 다시 공격했습니다. 물러서는 소배압과 강감찬이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곳이 바로 ‘귀주’이고 이 싸움을 ‘귀주대첩’이라고 하지요.

고려군과 거란군이 팽팽하게 맞서 처음에는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았으나 개경에 있던 고려군 부대가 합세하면서 거란군에게 불리한 상황이 됐습니다. 고려군은 북쪽으로 달아나는 거란군 대부분을 처단했습니다. 살아서 돌아간 거란군은 수천 명 밖에 되지 않았고 소배압은 갑옷에 무기까지 버리고 죽기 살기로 압록강을 헤엄쳐 달아났다고 전해집니다.

[한 뼘 더] 중국엔 만리장성, 고려엔 ‘천리장성’이?

기원전 220년 진시황이 쌓기 시작해 명나라 시대까지 지어진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군사 시설인 중국의 만리장성. 고려 때 우리나라에는 천리장성이 있었다는 사실, 알고 있나요?

거란과 세 차례나 크게 싸운 이후 고려는 거란을 비롯한 여진 등 북방 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북쪽 국경선을 따라 약 1000리에 이르는 긴 성을 지었습니다.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크고 긴 성이었지요. 높이는 8m, 길이는 약 393㎞에 이르렀으며 총 12년에 걸쳐 쌓아 올렸습니다. 이후 천리장성은 고려의 국경이 되었고, 외적의 침입을 막는 중요한 역할을 했지요.​


서울 송파구 석촌호수 초입에 있는 남한산성 삼전도비


1636년 음력 12월 14일,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난함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조선 제16대 왕인 인조는 자신을 왕위에 올려준 신하들의 바람대로 ‘친명배금’ 정책을 실시합니다. 명나라를 지지하는 인조를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던 후금은 조선을 공격했습니다. 후금을 피해 인조는 강화도로 몸을 옮깁니다. 이것이 정묘호란이지요.

후금은 나라 이름을 청으로 바꾼 뒤에는 황제의 나라인 ‘제국’을 선포하고 조선을 더욱 압박하며 군신관계를 맺을 것을 요구했습니다. 청은 왕, 조선의 신하의 나라임을 인정하는 굴욕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인조는 청과의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압록강을 건넌지 불과 14일 만에 개성에 도착한 청은 조선에게는 너무도 막강한 상대였습니다. 인조는 급히 남한산성으로 몸을 옮겼습니다. 남한산성에서 버티며 장기전을 벌이면 청군도 지쳐 돌아갈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지요. 청군은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조선군이 항복하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식량 부족과 추위 등으로 더 이상 산성 안에서 버틸 수 없게 되자 인조는 세자와 함께 남한산성 서문으로 나가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신하의 예를 갖춥니다. 이것을 ‘삼전도의 굴욕’이라고 합니다.​


리우올림픽 여자골프 국가대표 감독으로 활동할 당시의 박세리


1998년 12월 8일, 박세리, LPGA 올해 선수로 선정

온 국민이 IMF 경제위기의 영향으로 힘들어하던 1998년, 미국에서 기쁜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우리나라의 박세리 선수가 미국여자프로골프협회(LPGA) 투어 메이저 대회인 US여자오픈에서 한국인 최초로 우승을 했다는 뉴스였죠. LPGA 투어는 세계적 권위를 자랑하는 여자 국제 프로 골프대회입니다. 앞서 또 다른 메이저 대회인 맥도널드 LPGA 챔피언십에서 정상에 오른 것에 이은 쾌거(통쾌하고 장한 행위)였습니다. 박세리는 1998년 LPGA 올해의 신인왕과 미국 골프기자협회가 주는 올해의 여자 선수상 등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세계 무대에 데뷔했습니다.

이후 박세리는 2001년 브리티시여자오픈 투어 우승에 이어 2002년 LPGA 챔피언십 우승을 차지하며 만 24세의 나이로 최연소 메이저 대회 4승이라는 기록을 달성하기도 했습니다. 2004년 5월 LPGA 투어 미켈럽울트라오픈에서 우승하며 LPGA 명예의 전당에 오르기 위한 조건을 모두 충족했고, 2007년 6월 아시아인 최초이자 최연소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우수한 업적을 인정받아 명예로운 자리에 오름)됐습니다.

이후 2016년 US여자오픈이 끝나고 2016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여자골프팀 감독으로도 활약하며 박인비 선수의 금메달을 이끌어내기도 했습니다. 박세리는 같은 해 10월 LPGA 투어 KEB하나은행 챔피언십 경기를 끝으로 20여 년 간의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습니다.​


▶어린이동아 장진희 기자 cjh062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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