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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rt&History] 비운의 황태자였던 영친왕
  • 장진희 기자
  • 2019-12-01 15: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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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그날] 역사 속 이번 주엔 어떤 일이 있었을까? 기록이 뚜렷하게 남아있는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시작으로 근현대까지의 같은 날 있었던 사건들을 한 주 단위로 파악합니다. 이번 주는 12월 1∼7일 발생했던 역사적인 사건들을 살펴보세요.


1911년 영친왕(왼쪽에서 다섯 번째)과 이왕직 소속 관리들이 석조전 중앙홀에서 찍은 기념사진. 동아일보 자료사진


1907년 12월 5일, 이토 히로부미, 영친왕을 일본으로 끌고 감

1907년 12월 15일,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1897∼1970)이 일본 도쿄의 신바시역 플랫폼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는 통감(일제강점기 통감부 장관)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였습니다. 영친왕은 조선의 마지막 왕이자 대한제국 제1대 황제인 고종의 일곱 번째 아들입니다.

당시 불과 10세였던 영친왕은 부모인 고종황제와 엄황귀비 품을 떠나 인천항을 출발한 지 열흘 만에 일본에 도착했습니다. 유학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에 갔지만 사실상 인질로 잡혀간 것이었지요.

1907년은 고종황제가 일제에 의해 강제로 폐위(왕의 자리를 폐함)되고 고종의 맏아들인 순종이 황제로 즉위한 해입니다. 이와 함께 고종의 일곱 번째 아들 영친왕은 황태자(황제의 자리를 이을 이)로 책봉됐습니다. 황태자라는 중요한 자리에 있음에도 영친왕은 대한제국이 쇠퇴하는 가운데 일본에 볼모(나라 사이에 조약 이행을 담보로 상대국에 억류하여 두던 유력 인사)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일본에 건너 간 영친왕은 조국이 몰락하는 것을 지켜보며 하루하루 힘겨운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1910년 일제의 침략으로 대한제국이 국권을 상실하자, 일제는 순종을 황제에서 왕으로, 영친왕은 황태자에서 왕세제(왕위를 이어받을 왕의 아우)로 강등(계급을 낮춤)시켰습니다.

1920년엔 일본의 강요에 의해 일본 왕실 출신인 나시모토 마사코(한국명 이방자)와 정략결혼을 했습니다. 황태자가 되기 전 동갑내기 소녀와 약혼한 상태였지만 일제는 이를 무시하고 강제로 결혼하게 했습니다.

일본에 거주하며 철저한 일본식 교육을 받은 영친왕은 일본 육군사관학교와 육군대학을 거쳐 육군 중장(군대 계급의 하나)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1945년 광복 이후 조국으로 돌아오려고 했지만 이승만 정부는 귀국을 거부했습니다. 이후 재일(일본에 살고 있음) 한국인의 신분으로 일본에서 지내야 했던 영친왕은 1963년이 되어서야 박정희 정부에 의해 입국이 허락되어 꿈에 그리던 한국 땅을 밟았습니다.

그러나 영친왕은 귀국 당시 뇌혈전증(뇌에 혈액공급이 차단돼 나타나는 증상)으로 실어증(언어를 이해하거나 구사하는 능력에 장애가 발생하는 증상)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결국 약 7년간의 투병 끝에 1970년 한 많았던 생을 마쳤습니다.​

[한 뼘 더] ‘친왕’과 ‘왕’의 차이는?

대한제국이 수립한 뒤 태어난 고종 황제의 아들 이은은 태어날 때부터 그 신분이 ‘황제의 아들’이었고 1900년에는 ‘영친왕’으로 책봉됐습니다. 황제의 아들이 왜 ‘왕(王)’이 됐을까요? 대한제국 시기에는 황제의 황위를 물려받을 황태자 한 명을 제외한 나머지 아들들은 모두 ‘왕’으로 책봉했습니다.

황제의 아들로 태어났기에 왕이 된 이들을 다른 종류의 왕과 구분하기 위해 굳이 ‘친왕’이라고 특별히 구분된 왕호를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이은이 받은 왕호 역시 ‘친왕’이었고, 왕호에 붙인 이름이 ‘영’이었기 때문에 그가 ‘영친왕’이 된 것이지요.​


지난 2010년 과거사 정리 위원회가 사건에 대한 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2005년 12월 1일,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 설립

2005년 5월 31일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기본법’이 공포(널리 알림)되면서 같은 해 12월 1일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가 출범했습니다. 이 위원회는 일제강점기 직전부터 제6공화국까지 약 100년간의 과거사를 조사하기 위해 꾸려진 독립기관이었습니다.

과거사 정리 위원회는 △항일독립운동 △6·25 전쟁 전후의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 △반민주적·반인권적 행위에 의한 인권 유린(권리를 짓밟음) △폭력·학살·의문사 등을 조사해 왜곡된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과거사를 바로잡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출범한지 4년 2개월 여 만인 2010년 6월 30일 조사 활동을 공식 종료할 때까지 위원회는 접수되거나 직권 조사한 사건 1만1160건 중 9987건의 처리를 마쳤습니다. 이 중 진실을 밝힌 사건은 7700건이며 문헌, 목격자, 현장자료가 부족해 진실을 규명하지 못한 사건은 221건입니다. 나머지는 기각된 사건입니다.

진실이 밝혀진 사건에 대해 해당 국가기관에 위령 사업 추진 등의 권고를 내렸지만, 강제성이 없어 후속조치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는 비판도 받았습니다.


서울 종로구에 있는 ‘녹두장군’ 전봉준의 동상


1894년 음력 12월 2일, 전봉준, 순창에서 체포돼 서울로 보내짐​

유난히 작은 몸집 때문에 ‘녹두’라 불렸던 전봉준은 조선 말기에 동학농민운동을 이끌었던 인물입니다. 1860년 종교사상가인 최제우가 창시한 민족 종교인 동학은 ‘신분. 빈부, 성별 등에 관계없이 사람은 모두 평등하다’는 사상을 기반으로 해 힘없는 농민들 사이에서 큰 지지를 얻었습니다.

흉년으로 백성은 굶주리고 주변 나라는 조선을 손에 넣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어지러운 때, 조병갑이 고부(현 전북 정읍) 군수로 부임하면서 부정부패를 일삼았습니다. 참다못한 전봉준은 1894년 동학교도와 농민을 이끌고 군청을 습격해 관리를 처단하고 창고에 있는 식량을 백성에게 나눠줬습니다. 이것이 바로 동학농민운동의 시작이었던 ‘고부민란 사건’입니다.

이후 동학군은 계속해서 부패한 관군과 맞서 싸웠고 전라도 땅 대부분을 차지할 만큼 세력을 키워갔습니다. 그러나 조선은 동학군을 막기 위해 청나라 군사와 일본군을 불러들였고,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 동학농민군은 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순창에 몸을 숨겼던 전봉준도 체포되어 일본군에 의해 서울로 보내진 뒤 1895년 처형되고 말았습니다.


▶어린이동아 장진희 기자 cjh062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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