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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rt&History] 헌법의 뿌리 된 대한민국 건국 강령
  • 장진희 기자
  • 2019-11-24 13:5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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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그날] 역사 속 이번 주엔 어떤 일이 있었을까? 기록이 뚜렷하게 남아있는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시작으로 근현대까지의 같은 날 있었던 사건들을 한 주 단위로 파악합니다. 이번 주는 11월 17∼23일 발생했던 역사적인 사건들을 살펴보세요.


‘대한민국 임시정부 건국강령 초안’. 문화재청 제공


1941년 11월 28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한민국 건국 강령’ 발표

1919년 4월 중국 상하이에서 조직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5년 해방 전까지 모두 여섯 차례에 걸쳐 국가의 근간(뿌리와 줄기를 이르는 말)이라 할 수 있는 헌법을 만들거나 수정했습니다. 1941년 11월 28일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통과한 ‘대한민국 건국 강령’은 정식 헌법문서는 아닙니다. 해방 이후 헌법 제정에 대비해 장차 독립된 새 국가의 시스템을 어떻게 만들고, 국가 정책을 어떤 방향으로 펼칠 것인지에 대해 정리한 문헌이지요. 국권회복 과정과 그 이후의 건국과정에서 정부가 어떤 정책을 추진해야 할 것인지를 발표했습니다.

건국 강령은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사상가였던 조소앙의 ‘삼균주의’에 입각(어떤 사실 등에 근거를 둠)해 작성됐습니다. 삼균주의는 개인과 민족, 국가 간 균등과 정치·경제·교육 균등을 통해 이상사회를 이루자는 이론입니다. 건국 강령은 ‘새로운 민주주의 확립과 사회계급의 타파, 경제적 균등주의의 실현’을 주창했습니다. 건국 강령에 따르면, 국가 건설은 ‘독립 선포→ 정부 수립→ 국토 수복(땅을 되찾음)→ 건국’의 과정으로 이뤄지며 보통 선거를 통한 민주공화국을 수립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건국 강령은 1948년 제정된 제헌헌법의 근간으로 평가받습니다. 조소앙이 국한문 혼용으로 적은 친필 문서인 ‘대한민국 임시정부 건국강령 초안’은 지난해 등록문화재 제740호로 지정됐습니다. 문화재청은 “임시정부가 광복 이후 어떠한 국가를 세우려 했는지 알려주는 유물이자 조소앙이 고심하며 고친 흔적이 남아 있어 더욱 가치가 높다”고 밝혔습니다.

[한 뼘 더] 조소앙 선생의 업적은?

조소앙 선생(1887∼1958)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주역 중 한 명입니다. 그는 임시정부의 외무부장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조소앙 선생은 17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공부하다 1913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해 독립운동에 몸을 바쳤습니다. 1919년 5월 그는 한국의 독립을 세계 각국에 인정받기 위해 파리강화회의에 참석차 김규식, 여운홍과 함께 유럽행에 올라 주목을 받았습니다. 김구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창당하고 ‘삼균주의’를 창시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해방 후에는 조국으로 돌아와 대한민국 건국 강령에 따른 건국 운동을 계획했습니다. 그러나 미국, 영국, 중국, 소련(옛날의 러시아) 4개국이 한국을 5년간 신탁통치하기로 결정하자 김구와 함께 반탁시위운동을 주도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조소앙 선생은 제2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기도 했으나 6·25 전쟁 중 납북(북한으로 납치해 감)되어 북한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주한 미군의 장갑차에 여중생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 이후 반미 시위가 열린 모습. 동아일보 자료사진


2002년 11월 27일, 미국 대통령, 주한 미군 여중생 사망 사건에 사과

2002년 6월 13일 경기 양주시 56번 지방도에서 미 2사단 공병여단 장갑차에 우리나라 여중생 2명이 치여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당시 중학교 2학년이던 신효순 양과 심미선 양은 같은 동네에 사는 친구의 생일잔치에 가기 위해 갓길을 걸어가던 중 사고를 당했습니다.

사건을 조사한 미 2사단장은 책임이 운전사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좁은 도로에서 무리하게 장갑차를 몰도록 한 지휘체계에도 있다고 밝혔지만, 운전병과 관제병에 적절한 처벌이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주한미군 지휘협정(SOFA)에 따라 주한미군의 공무수행 중 발생한 사건은 미군이 재판권을 갖도록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미군은 한국에 재판권을 넘기지 않았고 장갑차 운전병과 관제병은 모두 무죄 평결을 받았습니다.

미군 측의 편파적인 판결에 분노한 우리 국민들은 장갑차 사건 무죄판결 무효, 불평등한 한미 SOFA 전면 개정 등을 요구하는 반미 시위를 전국적으로 벌였습니다. 시위 열기가 거세지자 조지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은 주한 미국대사를 통해 사과의 뜻을 전했고, 같은 해 12월 13일에는 김대중 당시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깊은 애도와 유감을 전달한다”며 “유사 사건의 재발 방지를 위해 한국 측과 긴밀히 협조할 것”이라며 직접 사과했습니다.​


조선 제9대 왕 성종의 무덤인 선릉​


1469년 음력 11월 28일, 성종이 조선 제9대 왕위에 오름​

조카인 단종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조선 제7대 왕인 세조의 손자였던 성종(1457∼1494)은 예종(조선 제8대왕)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12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습니다. 어린 성종을 대신해 할머니인 정희왕후가 7년 동안 수렴청정(나이 어린 왕이 즉위했을 때 왕대비나 대왕대비가 국정을 대신하던 일)을 했습니다.

정희왕후가 물러나고 성종이 직접 정사를 다스리면서 왕권이 안정되기 시작했고, 이 시기에 유교정치의 기틀이 마련됐습니다. 성종은 불교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는 한편 성리학의 발전에 더욱 박차를 가한 왕입니다. 1485년 성종은 세조 때 편찬을 시작한 ‘경국대전’을 완성했습니다. 경국대전은 조선시대 때 나라를 다스리는 기준이 된 최고 법전이지요.

성종은 25년간 재위하면서 국정을 안정적으로 운영했으며 조선 개국 이후 추진된 여러 제도를 정비하면서 왕조가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어린이동아 장진희 기자 cjh062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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