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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rt&History] 불운의 왕자 이방원, 왕이 되다
  • 장진희 기자
  • 2019-11-10 16:2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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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0년 음력 11월 11일, 이방원이 조선 제3대 왕으로 즉위

역사 속 이번 주엔 어떤 일이 있었을까? 기록이 뚜렷하게 남아있는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시작으로 근현대까지의 같은 날 있었던 사건들을 한 주 단위로 파악합니다. 이번 주는 11월 10∼16일 발생했던 역사적인 사건들을 살펴보세요.​



‘태종대왕 전통 문화행사’에서 임금의 행렬이 재현되고 있는 모습. 동아일보 자료사진​


태종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울 태종 헌릉 신도비’. 문화재청 제공​

고려 말, 새로운 나라 건국에 반대하며 ‘단심가’를 읊었던 문신 정몽주를 처단하고 이성계(이후 태조)에게 힘을 실어준 이가 있었으니…. 이성계의 다섯 째 아들 이방원이 그 주인공이지요. 이방원이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살해하면서 이성계를 견제할 세력이 사라졌고 조선 건국은 순조롭게 진행됐습니다. 새 왕조를 여는 데 중요한 고비가 있을 때마다 이방원은 항상 아버지 이성계의 곁을 지켰습니다.

조선 건국을 도운 이방원은 내심 자신이 후계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기대와는 다르게 태조는 이방원을 개국공신 선정에서 제외하고, 둘째부인 사이에서 낳은 여덟 째 아들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했습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이방원은 자신을 견제하며 정치에서 소외시켰던 이성계의 충신 정도전을 제거하고 세자인 이방석과 그의 형인 이방번도 죽게 했습니다. 이 사건을 ‘1차 왕자의 난’이라고 합니다.

세자를 죽인 후 이방원은 야심대로 바로 왕위에 오를 수는 없었습니다. 권력을 쥐기 위해서 형제를 죽인 것이 알려지면 신하와 백성들의 지지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방원은 우선 형인 이방과(이후 정종)가 아버지인 태조를 이어 왕이 되게 했습니다. 왕위에 오른 정종은 예상대로 정치적 실권을 행사하지 못했습니다. 아우인 이방원이 뒤에서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이죠.

이방원의 형인 이방간 역시 왕위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고, 결국 방원과 방간은 서로 칼을 겨누고 싸움을 벌였습니다. 이것이 ‘2차 왕자의 난’이지요. 친형제끼리 싸움을 벌였다는 사실을 안 정종은 화를 내며 이방간을 귀양 보냈습니다. 방간이 사라지자 이방원의 힘은 더욱 커졌고 위협을 느낀 정종은 왕이 된지 불과 2년 만인 1400년 서둘러 방원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습니다.

조선 제3대 임금이 된 태종은 형제와 백성의 존경을 받던 신하들을 죽이고 왕위에 오르기는 했으나 나라를 잘 다스리기 위해 노력한 왕입니다. 신문고를 만들어 백성의 억울함을 달랬고 노비를 마음대로 사고 팔 수 없게 하는 등 여러 제도를 고쳐 나라를 안정시켰지요. 태조 때 지은 성균관에서 학생들을 가르쳐 인재를 배출하기도 했습니다.​

[한 뼘 더] ‘함흥차사’의 유래는?​

심부름을 갔던 사람이 한참을 아무 소식 없이 돌아오지 않을 때 “함흥차사가 따로 없네?”라고 말하곤 하지요? 함흥차사라는 말은 아버지인 태조 이성계에게 태종 이방원이 용서를 구하는 과정에서 나오게 된 말입니다.

형제들끼리 서로 죽이고 다투는 것을 본 태조 이성계는 일찌감치 정종에게 임금 자리를 물려줬습니다. 태종이 왕위에 올랐을 때에 이성계는 서울을 떠나 고향인 함흥에 머물렀지요. 태종은 아버지에게 용서를 빌고 다시 궁궐로 모시기 위해 신하에게 ‘차사’라는 벼슬을 주고 함흥으로 보냈습니다. 이성계는 아들에 대한 실망감과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차사가 오면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모두 활을 쏘아 죽여 버렸습니다. 이때부터 한 번 가면 돌아오지 않는 사람을 가리켜 ‘함흥차사’라고 부르게 됐습니다.​


2005년 11월 15일​ 국방부, 실미도 부대원 유해 발굴 작업 개시​


서울 시내에서 군대와 경찰이 실미도 부대원들이 탄 버스를 포위한 모습

인천에서 20㎞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작은 무인도인 실미도. 1968년 당시 중앙정보부는 북한 침투 작전에 투입하고자 특수부대를 만들고 실미도에서 비밀리에 훈련을 이어갔습니다. 정부는 장교 임관이나 미군 부대 취직 등을 약속하며 민간인 젊은이 31명을 모집했습니다. 공작원들은 사회와 격리된 채 3년 여 간 혹독한 훈련을 받아야했습니다. 이들 중 7명은 훈련 중 숨졌습니다. 숨진 7명 중 4명은 탈영(군인이 무단으로 도망침)을 시도하거나 명령을 어겼다는 이유로 살해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가혹한 훈련과 인권 침해에 시달리던 공작원 24명은 1971년 8월 23일 기간병(군대에서 으뜸이 되는 병사) 18명을 살해하고 인천 해안에 상륙한 뒤 시내버스를 빼앗아 서울로 향했습니다. 출동한 군인, 경찰은 총격을 퍼부었고 이 과정에서 실미도 공작원 대부분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당시 박정희 정부는 이 사건을 북한의 소행이라고 발표했습니다.

30여 년 간 베일에 싸여있던 사건의 진실은 2003년 영화 ‘실미도’ 등을 통해 대중에 알려졌고, 2005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해 11월에는 실미도 부대원들이 묻힌 것으로 추정되는 서울시립묘지에서 유해 발굴 작업을 벌였고 일부의 유해를 확인했습니다.​

1945년 11월 12일 동양 척식 주식회사, 신조선회사(이후 신한공사)로 개칭​


현재 서울 을지로 2가에 위치해 있었던 동양 척식 주식회사

일제는 조선의 토지와 자원을 빼앗기 위해 1908년 동양 척식 주식회사를 세웠습니다. 조선을 식민지로 삼은 일제는 토지 조사 사업을 벌였습니다. 일본인 지주가 가진 토지 소유권을 법적으로 보호하고 세금을 잘 걷기 위해서였지요. 조선 정부나 왕실의 농토, 숲, 산지가 조선총독부의 차지가 되었고 총독부는 이 땅을 다시 동양 척식 주식회사에 넘겨 관리하도록 한 것입니다.

조선 최대의 지주가 된 동양 척식 주식회사는 농민들에게 땅을 빌려주거나 전국 곳곳에서 직접 농장을 경영했습니다. 땅을 빌린 농민들은 수확의 절반 가까이를 소작료로 지불해야 했습니다. 회사는 조선에 건너온 일본인들이 안정적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땅을 헐값에 팔기도 했습니다. 날로 착취가 심해지자 소작농들은 쟁의를 일으켰고 1926년에는 독립운동가 나석주가 회사에 폭탄을 던지며 우리 민족의 반감을 표하기도 했습니다.

해방 후인 1945년 미군정은 일제강점기에 동양 척식 주식회사가 소유한 재산을 인수하고 관리할 기구로 ‘신조선회사’를 세우기에 이릅니다. 이듬해에는 다시 신한공사로 회사의 이름이 바뀌었지요.​

▶어린이동아 장진희 기자 cjh062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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