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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rt&History] 조선 최고의 명장, 이순신 장군
  • 장진희 기자
  • 2019-07-21 14:4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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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7년 음력 7월 22일, 이순신,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겸 삼도 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됨

[역사 속 그날]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입니다. 기나긴 역사를 간직한 우리나라에선 과거에 어떤 중대한 사건들이 있었을까요? 매주 월요일 선보이는 ‘역사 속 그날’ 코너를 통해 역사 지식을 쑥쑥 키워보세요.

역사 속 이번 주엔 어떤 일이 있었을까? 기록이 뚜렷하게 남아있는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시작으로 근현대까지의 같은 날 있었던 사건들을 한 주 단위로 파악합니다. 이번 주는 7월 21∼27일 발생했던 역사적인 사건들을 살펴보세요.

1597년 음력 7월 22일, 이순신,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겸 삼도 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됨

1576년, 32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무과에 급제한 이순신(1545∼1598)은 함경도에서 활약했습니다. 무관이 된 후 쭉 북쪽에서만 지냈던 이순신은 조선의 문신 유성룡의 추천으로 임진왜란 직전인 1590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임명됐습니다.

이순신은 임명되자마자 혹시 모를 적의 침략에 대비해 준비태세를 철저히 갖췄습니다. 군사들을 강력하게 훈련시키는 한편 거북선을 제조하고 군량미를 확보해 부임(근무지로 감)한지 불과 1년여 만에 강력한 수군을 이끌게 되었지요. 1592년 왜군이 명나라로 가는 길을 내달라며 쳐들어온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이순신은 눈부신 활약을 보였습니다.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한산도대첩, 당포해전 등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크게 이긴 것이지요. 계속되는 해전에서 모두 승리한 이순신은 1593년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의 수군 전체를 지휘하는 삼도 수군통제사가 됐습니다.

승승장구하던 이순신은 1597년 그의 공로를 시기하는 세력에 의해 적의 장수를 놓아주었다는 모함을 받고 옥살이를 하게 됐습니다. 가까스로 죽음을 면한 이순신은 도원수(전쟁 시 군대를 통솔했던 임시 관직)였던 권율 밑에서 직책이 없는 일반 병사로 백의종군(벼슬을 달지 않고 싸움터에 나감)했습니다. 그러나 이순신의 뒤를 이어 삼도 수군통제사가 된 장군이 해전에서 왜군에 크게 패한 뒤 전사하면서 이순신은 그해 다시 삼도 수군통제사로 임명됐습니다.

이순신은 보란 듯이 전남 진도 울돌목에서 단 13척의 배로 130여 척을 가진 왜군에 맞서 크게 승리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명량대첩이지요. 전세를 뒤집은 이순신의 병사들은 1598년 조선 침략을 주도한 일본의 정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철수하는 왜군에 마지막으로 공격을 퍼부었습니다. 이들은 일본군 전함 500여 척에 맞서 경남 노량에서 해전을 벌였습니다. 조선 수군은 일본군의 함대 200여 척을 불태우는 등 큰 승리를 거뒀지만 이순신은 이 전투에서 적군이 쏜 총탄에 맞아 숨을 거뒀습니다. 아군의 기세가 꺾일까봐 이순신의 죽음은 전투가 끝날 때까지 비밀에 부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서울 중구 광화문광장에 위치한 이순신 장군 동상. 동아일보 자료사진

[한 뼘 더] 승리의 비결, 학익진 진법은?

이순신 장군은 한산도대첩에서 거북선을 활용한 ‘학익진 진법’으로 일본 수군을 물리쳤습니다. 학이 양 날개를 활짝 펼친 모양대로 배를 배치했다고 하여 학익진이라고 부릅니다. 이순신은 거북선을 반원 형태로 넓게 펼치면 줄지어 쳐들어오는 많은 수의 왜군함을 쉽게 격파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이 전략은 적을 포위 공격하기에 적합했기 때문이지요. 처음에는 군함을 일렬로 세워뒀다가 적군의 공격이 시작되면 중앙의 부대가 뒤로 물러나면서 좌우에 위치한 부대가 앞으로 달려 나가 적군을 포위해 집중적인 공격을 퍼부었다고 합니다.​


경남 통영 한산도 앞바다에서 학익진 전술을 재현하고 있는 모습




경기 광주시 남한산성 수어장대 인근 성벽


1626년 음력 7월 22일, 남한산성이 완공됨

1624년 조선 제16대 왕인 인조(1595∼1649)는 북한산성과 더불어 서울을 지키는 산성 중 하나로 신라 문무왕 때 쌓은 주장성의 옛터를 활용해 현 경기 광주시에 남한산성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1626년 음력 7월 완공된 남한산성에는 유사시에 대비해 행궁(임금이 임시로 머물던 별궁)을 비롯한 관아, 창고 등의 시설을 갖췄습니다.

조선시대에 남한산성은 국방의 보루 역할을 했습니다. 청나라는 조선이 ‘신하의 나라’라며 신하로서 예를 갖출 것을 요구했지만 조선은 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화가 난 청나라는 1636년 군대를 이끌고 한양에 쳐들어왔고 이것이 바로 병자호란입니다. 인조와 신하들은 남한산성으로 피신했습니다. 성에서 버티면서 장기전을 벌일 요량이었던 인조의 예측은 빗나가고 말았습니다. 청나라군은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조선군의 식량이 떨어지길 기다렸습니다.

그렇게 버티길 40여 일. 청의 공격을 당해낼 수 없었던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나와 한강 동남쪽에 위치한 삼전도에서 청태종(청나라의 제2대 황제)에 무릎을 꿇고 신하의 예를 갖췄습니다. 이게 바로 유명한 삼전도의 굴욕이지요.

 


소파 방정환 선생 초상화. 국가보훈처 제공

1931년 7월 23일, 문학가 방정환, 세상을 떠남

어린이들의 영원한 대부 방정환(1899∼1931) 선생은 1931년 7월 23일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방 선생은 ‘어린이’라는 말을 처음 만들고 어린이들의 인격을 존중해야 한다는 생각을 알리는 데 평생을 바쳤습니다.

1923년 방 선생은 본격적으로 어린이를 위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일본 도쿄의 하숙집에서 어린이 인권운동을 위한 단체인 ‘색동회’를 결성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어린이 잡지인 ‘어린이’를 창간했습니다. 같은해 5월 1일에는 색동회 발대식과 함께 어린이날 기념식이 열렸습니다.

방 선생은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독립운동가이기도 합니다. 1919년 3·1운동 당시 방 선생은 ‘독립신문’을 출판해 배포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1921년 11월에도 독립운동을 펼쳤다는 혐의로 일본에 붙잡혔습니다. 이에 굴하지 않고 어린이들의 민족의식을 함양하기 위해 노력했던 방 선생은 “어린이를 두고 가니 잘 부탁하오”라는 유언을 남기고 32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습니다.


▶어린이동아 장진희 기자 cjh062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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