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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봉길 의사 의거 90주년… 되살아난 독립운동의 불꽃
  • 장진희 기자
  • 2022-04-28 14: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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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의사 의거 90주년


매헌 윤봉길 의사 기념관(서울 서초구)에 있는 윤봉길 의사의 동상. 동아일보 자료사진




일제강점기였던 1932년 4월 29일, 중국 상하이 훙커우 공원(현 루쉰 공원)에서 일왕의 생일과 일본군의 상하이사변 승전(싸움에서 이김)을 축하하는 기념식이 열렸다. 행사가 끝나갈 무렵 한 청년이 일본군 주요 간부가 모여 있는 단상 위로 폭탄을 던졌다.

폭탄을 투척한 청년은 20대 독립운동가였던 윤봉길 의사(1908~1932). 이 사건을 ‘윤봉길 의거’라 일컫는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일본군 핵심 지도부 가운데 7명이 숨지거나 크게 다쳤다. 침체됐던 독립운동은 활기를 띠게 됐다. 윤봉길 의거 90주년인 오늘, 윤봉길 의사와 그의 의거에 대해 돌아보자.


윤봉길 의사가 한인애국단 선서식에서 촬영한 사진​



무장 투쟁을 각오한 윤봉길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사내대장부는 집을 나가 뜻을 이루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의미를 가진 말로 윤봉길 의사가 남긴 말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다. 일제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목숨을 내놓겠다는 결의가 담겼다.


1930년 윤봉길 의사는 이 같은 비장한 글을 남긴 채 고향을 떠나 만주 지역을 거쳐 중국 상하이로 향했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일제의 감시를 피해 상하이에서 활동 중이었기 때문이다. 상하이에서 백범 김구 선생(1876
~1949)을 만난 윤봉길 의사는 한인애국단에 가입했다.


김구 선생이 이끄는 한인애국단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일제의 주요 인물들을 암살하기 위해 결성한 비밀 독립운동 단체였다. 윤봉길 의사를 비롯해 이봉창 의사(1901
~1932) 등이 한인애국단 소속이었다. 윤봉길 의사는 1932년 4월 26일 한인애국단 선서식에서 공식적으로 단체에 가입한 뒤 선서문을 작성했다.



윤봉길 의거 직전 훙커우 공원에서 일왕 생일 등을 축하하는 모습



두 가지 폭탄 준비한 이유는?


‘물통 폭탄과 도시락 폭탄.’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는 두 개의 폭탄을 품에 숨긴 채 훙커우 공원 행사로 향했다. 기회를 엿보던 그는 물통 모양의 폭탄을 단상 위로 던졌다. 윤봉길 의사의 공격으로 일본군 총사령관이었던 시라카와 요시노리가 그 자리에서 숨졌다. 일제의 주요 인물 총 7명이 숨지거나 다쳤다.


윤봉길 의사는 행사에 참석한 일본군을 암살하기 위해 물통 폭탄을 준비했다. 도시락 폭탄은 거사(큰일을 일으킴)를 마친 뒤 스스로 목숨을 끊기 위한 용도로 갖춘 것이었다. 일제의 감시 때문에 폭탄을 물통과 도시락 모양으로 위장(본래의 모습이 드러나지 않도록 거짓으로 꾸밈)한 것. 도시락 폭탄을 준비한 이유는 일본군에 붙잡혀 죽임을 당하느니 스스로 생을 마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도시락 폭탄을 이용하기 전 현장에서 일본군에 붙잡힌 윤봉길 의사는 일본 군법의회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932년 12월 19일 일본 가나자와 형무소에서 총살형(총으로 쏘아 죽이는 형벌)으로 숨졌다. 광복 이후 그의 유해가 가나자와 쓰레기소각장에서 발굴됐고 우리나라로 옮겨져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에 안장(편안하게 장사 지냄)됐다.



백범 김구 선생(왼쪽)과 장제스 총통(오른쪽)이 비밀회담을 가지고 있다




카이로 선언 밑거름 된 윤봉길 의거


“중국의 100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


윤봉길 의거를 접한 당시 중국 국민정부(중국 국민당이 집권하던 중화민국의 과도정부)의 지도자 장제스는 이 같이 말했다. 1931년 일제는 중국의 만주 지역을 차지하고 이듬해에는 주요 도시인 상하이까지 점령한 상황이었다.


윤봉길 의사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을 향한 의지에 감명을 받은 장제스는 1932년 김구 선생과 첫 만남을 가졌다. 이후 장제스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장소와 비용을 제공하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장제스는 1943년 11월 카이로 선언 당시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과의 양자회담에서 한국 독립의 필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이에 윤봉길의 의거가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싸움에 짐)한 뒤에는 한국을 독립시킨다’는 내용을 담은 카이로 선언을 이끌어내는 데 밑거름이 됐다고 평가하는 시각도 있다.


▶어린이동아 장진희 기자 cjh062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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