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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범도 장군은 어떤 인물? 독립전쟁 이끈 장군의 '귀환'
  • 조윤진 기자
  • 2021-08-17 16: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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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 장군의 생전 모습. 뉴시스 자료사진​


15일 경기 성남에 있는 서울공항에 홍 장군의 유해가 도착해 이동 중이다. 뉴시스​


‘홍대장이 가는 길에는 일월(해와 달)이 명랑(흐린 데 없이 밝고 환함)한데 왜적군대 가는 길에는 비가 내린다. 에헹야 에헹야 왜적군대가 막 쓰러진다.’

1908년경 함경도 사람들이 독립운동가 홍범도 장군(1868∼1943)의 활약상을 노래한 ‘날으는 홍범도가’의 한 구절이다. 이 노래 가사처럼 일제강점기 백두산과 만주 벌판을 누비며 일본군을 토벌(무력으로 쳐 없앰)한 홍 장군은 일본군에게 두려운 존재이자 우리 민중에게는 든든한 방패였다.

홍 장군은 봉오동·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고 1921년 이후 연해주, 카자흐스탄 등으로 거처(자리를 잡고 사는 장소)를 옮기다 광복을 2년도 채 남기지 않은 1943년 타국(남의 나라)에서 숨을 거뒀다.

지난 15일, 홍 장군의 유해(무덤 속에서 나온 뼈)가 우리나라에 돌아왔다. 홍 장군이 일본군의 토벌을 피해 연해주로 이주한지 정확히 100년 만이다. 그간 홍 장군을 봉환(받들어 모시고 돌아옴)하기 위한 시도가 여러 차례 있었지만, 봉환 위치 등의 문제로 진전이 없었다.

그러던 중 지난해 카자흐스탄 대통령의 방한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논의가 이뤄지면서 홍 장군의 유해가 우리나라에 돌아오게 된 것. 정부는 홍 장군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죽은 이가 편안해지도록 장례를 지냄)한다. 독립투쟁의 전설로 불리는 홍 장군, 그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봉오동 전투의 영웅


홍 장군이 이끈 봉오동 전투를 다룬 영화 ‘봉오동 전투’의 포스터. 쇼박스 제공​


봉오동 전투가 벌어진 중국 길림성 봉오동의 모습.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나라 뺏긴 설움이 우리를 북받치게 만들고 소총 잡게 만들었다 이 말이야.”

2019년 개봉해 47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봉오동 전투’에 나온 대사다. 봉오동 전투는 홍 장군이 독립군을 이끌고 일본군과 싸워 승리한 대표적인 독립투쟁이다.

1868년 평양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홍 장군은 뛰어난 사격실력을 토대로 포수(총으로 짐승을 잡는 사냥꾼)로 활동하다 1895년 일본이 조선의 제26대 왕인 고종의 왕비 명성황후를 시해(임금 등 윗사람을 죽임)한 사건에 분노해 의병투쟁을 시작했다.

홍 장군의 전투 능력은 1920년 6월 7일 중국 길림성 봉오동 계곡에서 벌어진 봉오동 전투에서 특히 빛을 발했다. 당시 홍 장군은 좁은 계곡의 지형을 전략적으로 이용해 골짜기마다 병력을 숨겨뒀고 최신 무기를 갖춘 일본군 300여 명을 골짜기로 유인했다. 홍 장군의 지휘 아래 벌어진 이 전투에서 우리 독립군은 4명 사망, 2명 중상의 피해를 입었지만 일본군 병사는 157명이 사망했고, 나머지도 대부분 부상을 입었다. 봉오동 전투는 독립투쟁 역사상 최초의 전면전(모든 자원을 동원해 광범위하게 벌어지는 전쟁) 승리를 거둔 전투였다.


청산리 전투의 주역

청산리 전투의 장면을 상상해 그려낸 기록화. 독립기념관 제공​


증국 길림성에 있는 청산리 항일대첩 기념비​


봉오동 전투가 벌어진지 4개월만인 1920년 10월 21일. 5000명에 달하는 일본군 부대가 보복을 위해 중국 길림성에 있는 청산리를 공격했다. 박격포(높은 각도로 포탄을 쏘는 근거리용 화포) 등으로 무장한 정예부대였다. 홍 장군은 또 다른 독립운동가인 김좌진 장군(1889∼1930)과 함께 독립군 2000여 명을 이끌고 6일간 일본군과 맞섰다. 이 전투가 바로 우리나라 독립투쟁 사상 가장 큰 승리로 손꼽히는 청산리 전투다.

당시 홍 장군은 청산리 완루구에서 적군을 물리치고 김 장군이 고전(전쟁 등에서 몹시 힘들고 어렵게 싸움) 중이던 어랑촌으로 달려가 일본군을 공격해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1200여 명이 사망하고 2100여 명이 부상을 입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고 물러났다.

타국에서 마감한 생

홍 장군이 연달아 2개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면서 일본군은 대대적으로 독립군 토벌에 들어갔다. 1921년 홍 장군은 이를 피해 소련(과거 러시아)의 땅인 연해주로 거처를 옮겼다. 1922년 1월에는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표자회의에 50여 명의 독립운동가와 함께 참석해 소련을 세운 인물인 레닌을 만나고 ‘조선군 대장’이라고 적혀있는 레닌 친필 증명서 등을 받기도 했다.

이후 홍 장군은 연해주의 농장 등에서 일하다 1937년 11월에는 소련의 통치자인 스탈린의 한인 강제이주정책에 따라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으로 이동했다. 당시 스탈린은 국경지역에 거주하는 고려인들이 일본의 간첩으로 활동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이들의 거주지를 강제로 이동시켰다. 홍 장군은 1943년 10월 25일 서울에서 5000㎞ 떨어진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서 생을 마감했다.​

▶어린이동아 조윤진 기자 koala624@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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