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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rt&History] 남과 북, 서로를 향해 총부리 겨누다
  • 장진희 기자, 이지현 기자
  • 2019-06-23 14:2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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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남한 침략으로 6·25 전쟁 발발

[역사 속 그날]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입니다. 기나긴 역사를 간직한 우리나라에선 과거에 어떤 중대한 사건들이 있었을까요? 매주 월요일 선보이는 ‘역사 속 그날’ 코너를 통해 역사 지식을 쑥쑥 키워보세요.

역사 속 이번 주엔 어떤 일이 있었을까? 기록이 뚜렷하게 남아있는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시작으로 근현대까지의 같은 날 있었던 사건들을 한 주 단위로 파악합니다. 이번 주는 6월 23~29일 발생했던 역사적인 사건들을 살펴보세요.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에 설치된 6·25 전쟁 관련 조형물. 동아일보 자료사진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남한 침략으로 6·25 전쟁 발발

1945년 8월 15일, 해방의 기쁨을 맛본 것도 잠시 한반도에는 또 다른 외세인 미국과 소련이 들어서게 됐습니다. 1945년 12월 미국, 영국, 소련은 모스크바에서 열린 3국 외상 회의에서 미국, 영국, 중국, 소련 4개국이 한국을 5년간 신탁통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신탁통치란 강대국이 독립할 능력이 없는 나라를 일정기간 대신 통치하는 것을 말합니다.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위해 한반도에 그어진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남쪽에는 미군이 북쪽에는 소련군이 주둔하게 됐습니다. 1948년에는 남북에 각각 단독 정부가 수립됐습니다. 서로 다른 사회 체제를 택해 대립하던 남북은 38선 인근에서 크고 작은 전투를 벌였습니다.

1950년 6월 25일, 소련의 도움으로 군사력을 키운 북한군은 선전포고도 없이 군사분계선인 38선을 넘어 남한을 침략했습니다. 무서운 기세로 내려온 북한은 3일 만에 수도인 서울을 점령했고 국군은 낙동강 이남까지 후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남한의 지도자였던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에 도움을 요청했고 유엔(UN·국제연합)은 미국을 중심으로 한 16개국의 군대가 참여하는 유엔군을 한국에 파견했습니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을 거둬 국군과 유엔군은 평양을 비롯한 북한 지역 대부분을 장악하고 압록강까지 진출했습니다. 그러나 그 해 10월 중국군이 북한군을 돕기 시작하면서 국군과 연합군은 한강 이남까지 밀려나게 됐습니다. 38도선 부근에서 치열한 전쟁을 벌이던 남북은 1951년 7월 10일 휴전 회담을 시작했습니다.

오랜 협상 끝에 1953년 7월 27일 남북은 휴전 협정을 맺고 다툼을 멈췄습니다. 3년 여 간의 전쟁으로 한국군 13만 7000명이 숨졌습니다. 유엔군 희생자도 4만여 명에 이릅니다. 전쟁으로 10만 명의 어린이가 부모를 잃었습니다. 맞서 싸우던 전선은 휴전선이 되었고 한반도는 지금과 같이 남북으로 갈라졌습니다.​

[한 뼘 더]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비결은?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은 북한군의 거침없는 진격을 막을 수 있는 효과적 수단은 상륙작전(바다를 통해 적군의 땅에 상륙해 공격을 펼침)이라고 봤습니다. 태평양 전쟁 당시 상륙작전을 성공시킨 경험이 있는 맥아더는 북한군의 경계가 허술한 인천을 통한 상륙을 구상했습니다.

밀물과 썰물로 인한 해수면 높이의 차이가 매우 커 인천을 통한 상륙은 어려울 것이라는 반대를 무릅쓰고 맥아더는 자신의 계획을 밀어붙였습니다. 인천 상륙은 적군이 쉽게 예상하지 못할 작전이기 때문에 오히려 기습효과를 노릴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지요.

1950년 9월 15일 새벽 개시한 상륙작전에서 유엔군은 2000명에 이르는 적을 쉽게 제압하고 인천을 탈환(빼앗아 찾음)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맥아더의 생각대로 적군의 감시는 느슨했습니다. 유엔군은 계속 내륙으로 진출해 수도인 서울을 되찾았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서울 용산구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열린 제73주년 경찰의날 기념식에 참석에 앞서 민갑룡 경찰청장과 백범 동상 앞에서 묵념하고 있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제공


1949년 6월 26일, 백범 김구, 경교장에서 안두희에게 피살

우리나라의 정치가이자 독립운동가였던 백범 김구 선생. 그는 1919년 3·1운동 직후 상하이로 망명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는 결사단체인 한인애국단을 조직해 이봉창·윤봉길 의사 등의 의거를 지휘하기도 했습니다. 1944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에 선임되지요.

광복 후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결정된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였습니다.

1948년 5월 10일 제1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북한·소련과의 갈등으로 유엔에 의해 남한 단독정부 수립이 추진되자 김구 선생은 통일정부수립을 위한 남북협상을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지요. 그 후 1949년 6월 26일 경교장에서 육군 포병 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당했습니다.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되었으며,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습니다. 저서로는 ‘백범일지’가 있습니다.​


헤이그 특사로 파견됐던 이준, 이상설, 이위종(왼쪽부터). 동아일보 자료사진​


1907년 6월 25일, 고종 황제의 밀사 이상설·이준·이위종, 만국 평화 회의가 개최된 네덜란드 헤이그 도착​

1906년 6월 러시아 황제 니콜라스 2세가 극비리에 고종 황제에게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2회 만국 평화 회의의 초청장을 보내왔습니다. 고종은 일제의 폭력적 침략을 알리고 을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하기 위해 이 회의에 이상설, 이준, 이위종으로 구성된 특사를 파견했습니다.

1907년 6월 25일 헤이그에 도착한 이들은 평화회의에 공식적 한국 대표의 자격으로 참석하기 위해 활동을 벌였지만, 의장인 러시아대표 넬리도프 백작과 네덜란드 외무대신 후온데스는 이미 을사늑약을 승인한 이상 한국정부의 자주적인 외교권을 인정할 수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이들의 회의 참석과 발언권을 거부했습니다.

특사들은 7월 9일 영국의 언론인 스테드가 주관한 각국 신문기자단의 국제협회에 참석해 세계의 언론인들에게 한국의 실정을 알리고 주권 회복에 도움을 청하는 ‘한국의 호소(A Plea for Korea)’를 발표해 청중의 공감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끝내 이들의 만국 평화 회의 참석은 거부되었고 이준은 7월 14일 회의 참석 실패에 대한 슬픔으로 순국하게 됩니다. 특사 일행은 만국 평화 회의가 끝난 뒤에도 각국을 순방하면서 국권 회복을 위한 외교 활동을 펼쳤습니다.

▶어린이동아 장진희 기자 cjh0629@donga.com, 이지현 기자 easy2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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