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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rt&History] 쇄국의 빗장, 더욱 굳게 닫히다
  • 장진희 기자
  • 2019-04-21 14:2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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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년 음력 4월 24일·25일, 광성진 전투 발생·척화비 건립 지시

[역사 속 그날]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입니다. 기나긴 역사를 간직한 우리나라에선 과거에 어떤 중대한 사건들이 있었을까요? 매주 월요일 선보이는 ‘역사 속 그날’ 코너를 통해 역사 지식을 쑥쑥 키워보세요. 

역사 속 이번 주엔 어떤 일이 있었을까? 기록이 뚜렷하게 남아있는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시작으로 근현대까지의 같은 날 있었던 사건들을 한 주 단위로 파악합니다. 이번 주는 4월 14~20일 발생했던 역사적인 사건들을 살펴보세요.

1871년 음력 4월 24일·25일, 광성진 전투 발생·척화비 건립 지시




조선 고종 때인 신미년(1871년) 음력 4월, 미국 함대가 강화도에 쳐들어왔습니다. 이 사건을 신미년에 서구 세력이 찾아와 일으킨 소란이라는 뜻으로 ‘신미양요’라고 합니다. 미군은 1866년 대동강에 정박했던 제너럴셔먼호가 조선 군민의 공격으로 불타버린 사건을 빌미로 조선에 통상(나라끼리 물품을 사고 팖)을 강요하며 쳐들어왔습니다. 고종의 아버지이자 조선의 정치가였던 흥선대원군은 강력한 쇄국(다른 나라와 통상을 금지함)정책을 펼쳤던 인물. 흥선대원군은 통상을 거부하고 미군에게 즉시 철수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경고에도 불구하고 1871년 음력 4월 24일 미군이 광성진으로 쳐들어오자 이에 맞선 조선의 장수 어재연이 600명의 군사와 함께 치열하게 전투에 참여했습니다. 미군의 것에 비해 한없이 초라한 무기를 가졌던 조선군은 목숨 바쳐 싸웠으나 광성진을 미군에게 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군은 광성진을 손에 넣은 이후에도 조선군이 계속해서 강하게 저항하자 결국 조선에서 철수합니다.

프랑스에 이어 미국까지 서구 열강을 두 차례나 물리친 흥선대원군은 자신감을 얻어 더욱 더 나라의 빗장을 걸어 잠갔습니다. 흥선대원군은 1871년 음력 4월 25일 이 뜻을 많은 이들에게 알리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에 척화비를 설치할 것을 지시합니다. 척화비에는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가깝게 지냄)하자는 것이니,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라는 내용이 담겼습니다​.

[한 뼘 더] 흥선대원군은 왜 쇄국책을 폈을까?

흥선대원군은 왜 통상을 요구하는 서구를 배척했을까요? 이 사건이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을 더욱 견고히 했다는 분석이 있습니다. 바로 ‘오페르트 도굴 사건’입니다.

독일 상인이었던 오페르트는 1866년과 1868년 두 차례에 걸쳐 조선에 통상 수교를 요구하며 이양선조선 후기의 서양의 배로 ‘모양이 다른 배’라는 뜻)을 타고 조선 해안가에 접근했습니다. 그러나 요구가 거절당하자 그에 대한 보복으로 오페르트는 1868년 4월 흥선 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를 파헤치고 도굴을 시도합니다. 이 사건으로 크게 분노한 대원군은 서구를 경계하고 배척하게 된 것이지요.​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소설가 현진건. 동아일보 자료사진

1943년 4월 25일, 소설가 현진건 사망

가난한 인력거꾼의 삶을 그린 일제강점기 단편소설 ‘운수 좋은 날’의 작가 현진건이 1943년 4월 25일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1900년 대구 출생인 현진건은 ‘동명’ ‘시대일보’ 등을 거쳐 1924년 동아일보사에 입사하며 1936년까지 기자로 활동한 일제강점기 언론인 겸 소설가입니다.

1921년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단편소설 ‘빈처’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현진건은 연이어 ‘타락자’ ‘운수 좋은 날’ 같은 소설을 발표하며 사실주의(현상을 객관적으로 재현하려는 태도) 문학의 개척자로 자리매김했습니다. 그의 초기 작품들은 주로 암울한 시대 앞에서 고뇌하는 지식인의 삶을 조명했습니다. 반면 후기로 갈수록 그는 힘없는 하층민을 주인공으로 하여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비참한 현실을 고발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동녕 선생 사망 제68주기 행사에서 참가자들이 이 선생을 추모하고 있다

1924년 4월 23일, 이동녕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에 취임​

지난 4월 11일은 현 대한민국의 뿌리인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100주년이 되는 날이었죠? 임시정부의 기초를 닦은 독립운동가로 김구 선생이 널리 알려져 있는데요. 김 선생 못지않게 임시정부를 위해 헌신한 인물이 바로 이동녕 선생입니다. 김 선생은 백범일지에 자신을 키워준 사람이 이 선생이었다고 쓸 만큼 그를 각별하게 생각했습니다.

임시정부 수립 하루 전인 1919년 4월 10일 개최된 임시의정원 1차 회의에서 초대 의장으로 사회봉을 잡은 것도 이 선생입니다. 이후에도 이 선생은 20여 년간 임시정부의 터줏대감으로서 동지들과 함께 광복을 위해 애썼습니다. 1924년 4월 23일에는 임시정부 국무총리에 취임했고 1926년 국무령, 1927년 주석 등을 지내면서 임시정부를 이끌었습니다. 1940년 이 선생은 파벌 싸움을 하던 동료들에게 “대동단결만이 독립을 앞당길 수 있다”는 말을 남기고 중국에서 숨을 거뒀습니다.


▶어린이동아 장진희 기자 cjh062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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