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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he 리더]백범 김구 선생 서거 64주년
  • 어린이동아 취재팀
  • 2013-06-28 00: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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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소원은 오직 대한의 독립입니다”

[The 리더]백범 김구 선생 서거 64주년

“독립만 된다면 독립정부의 문지기라도 좋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주석인 백범 김구 선생이 서거(세상을 떠남)한 지 64주년을 맞은 26일 오전 서울 용산구 백범김구기념관과 인천 남동구 인천대공원백범광장 등에서 ‘제64주기 백범 김구 선생 추모식’이 열렸다.

 

평생을 독립운동에 몸 바친 백범 김구 선생(1876∼1949). 21세 때 일본 중위 쓰치다를 맨손으로 처단하면서 독립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그는 1919년 3·1운동 직후 상하이로 망명(정치적인 이유로 자기 나라에서 괴롭힘을 받고 있거나 그럴 위험이 있는 사람이 이를 피하기 위하여 외국으로 몸을 옮김)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경무국장, 내무총장, 국무총리 대리 등으로 활약했다. 1931년에는 한인애국단을 조직해 1932년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정의를 위하여 개인이나 집단이 의로운 일을 도모함)를 주도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주석으로서 독립운동가들과 온 국민의 지지를 받았던 그의 리더십을 알아본다.

 

단호한 결단력으로 실천

 

김구는 독립운동을 하는데 있어서는 누구보다 강인하고 대담한 사람이었다. 1895년 일제가 궁궐을 침입해 국모를 시해한 을미사변 이후 한민족의 분노가 거세게 불타오르고 있을 때였다. 1896년 2월 한 주막에서 일본 육군 중위 쓰치다가 조선인으로 변장하고 있는 것을 맞닥뜨린 것. 김구는 무역이나 장사를 하는 일본인 같으면 변장하고 다닐 이유가 없으니 국모를 시해한 사람이거나 그 일당일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에 당시 21세였던 김구는 그 즉시 쓰치다를 처단해 국모의 원한을 푸는 첫 거사를 단행했다. ‘국모의 원수를 갚으려고 이 왜 놈을 죽였노라’라는 내용의 글과 함께 자신의 서명까지 한 종이를 길가에 붙였다.

 

이 사건이 일어난 지 3개월 후 김구는 체포되었으나 일본인에게 도리어 “어느 나라 법에 서로 친하게 지내겠다는 조약을 맺고서 그 나라의 임금이나 황후를 죽이라고 하였더냐”라면서 “우리나라의 치욕을 씻고야 말 것이다”라고 소리 높여 꾸짖었다.

 

 

1946년 3월 1일 서울 보신각 앞에서 열린 3·1절 기념식에서 김구(가운데)가 만세삼창을 하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나라와 겨레를 위해 헌신하는 자세

 

김구가 나라와 겨레를 위해 평생을 헌신하는 자세로 살았다는 것은 그의 이름과 호에서도 잘 드러난다.

 

원래 김구의 이름은 ‘창암’이었으나 1911년 일제의 호적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름을 구(九)로 바꾸고, 호를 ‘백범’이라고 지었다. ‘백범’이란 조선시대에 가장 미천하게 여겼던 계층인 백정의 ‘백(白)’자와 평범한 사람이라는 뜻의 ‘범(凡)’자를 합친 것으로, ‘가장 낮은 사람’을 뜻한다. “독립된 정부의 문지기가 되겠다”는 그의 발언에서 볼 수 있듯이 스스로를 낮추면서 독립운동에 애썼던 것이다.

 

한편 ‘백범’에는 우리나라의 백정부터 평범한 사람까지 모두가 적어도 자신만큼의 애국심을 가진 사람이 되게 하겠다는 굳은 의지도 담겨있다. 동포들의 애국심이 높지 않고는 완전한 독립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일제에 대항할 군대를 만들다

 

1932년 당시 침체에 빠진 임시정부와 한국독립운동을 활성화시켰던 것은 한인애국단 이봉창과 윤봉길 의사의 거사였다. 당시 한인애국단에 대한 모든 권한을 맡았던 김구는 1932년 1월 이봉창 의사를 일본 동경에 파견해 일왕을 저격하게 했고, 같은 해 4월에는 윤봉길 의사가 상해 홍구공원에서 폭탄의거를 일으켜 일본군 사령관 시라가와 대장 등 지위가 높은 관리들을 숨지게 해 국내외를 깜짝 놀라게 했다.

 

김구가 나라를 잃은 상황에서 정식군대인 한국광복군을 만들어 낸 것도 높이 평가받는 점이다. 한국광복군은 1941년 설립 당시 30명에 불과했으나 1945년 8월 일제가 점령하던 우리나라로 진격할 계획을 세울 때는 700명에 이르렀다. 1944년 4월에는 한미 간 군사합의를 통해 미군과 합동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김은정 기자 ejkim@donga.com

 

 

※ 백범 김구 선생이 남긴 명언

 

눈 덮인 들판을 밟고 갈 때는 어지러이 걸어서는 안 된다. 오늘 내가 걸었던 길은 뒷사람이 그대로 따를 테니까.

 

김구가 좌우명으로 삼았던 서산대사 휴정의 시로, 후손들에게 모범을 보일 것을 강조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너의 소원은 무엇인가?”라고 하느님께서 물으신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저의 소원은 오직 대한의 독립입니다”라고 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인가?”라고 물으시면 나는 또다시 “우리나라의 독립입니다”라고 답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인가?”라고 세 번을 물으셔도 나는 더욱 소리 높여 “저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완전한 자주 독립입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김구의 자서전 ‘백범일지’ 마지막에 수록된 ‘나의 소원’ 중 일부로 우리나라의 독립을 염원하는 김구의 간절한 바람이 담겨있다.

 
어린이동아 취재팀 kid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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