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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I♥Books]아픈 역사 간직 서울 남쪽 최전선 ‘남한산성’
  • 어린이동아 취재팀
  • 2011-07-20 04: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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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이 첫 남한산성 여행 / 삼성당 펴냄

조선의 도읍지였던 한양(서울)을 지킨 남쪽의 최전선이 ‘남한산성’이다. 이곳이 적에게 뚫렸다는 것은 도읍이 함락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남한산성은 아픈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청나라가 쳐들어온 병자호란 때 인조가 오랑캐에게 머리를 조아렸고, 19세기 말에는 일제에 맞선 의병들의 본거지였다가 파괴되기도 했다.
경기도는 지난해 일제에 의해 파괴된 남한산성 행궁을 100년 만에 복원했다. 또 2014년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방학은 체험학습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가족이 함께 남한산성을 걸으며 역사여행을 떠나보면 어떨까.

 

●삼국시대∼조선 유적 ‘생생’


평범해 보이는 남한산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남한산성에는 삼국시대부터 백제 신라의 군사요충지로 유적이 남아 있고,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산성과 행궁, 사찰 등 산성마을의 형태가 역사적 기록과 함께 보존돼 있다.
백제 유물이 많이 출토돼 백제 온조의 성으로 알려지기도 했고, 수원화성을 축조한 정약용은 한성백제의 수도로 남한산성을 지목했다.
삼국사기에는 통일신라가 당의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주장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실제로 2005년 행궁터 발굴 당시 통일신라시대 초대형 건물터가 나오기도 했다.

 

●남한산성 행궁


행궁은 임금이 궁궐 밖을 행차해 머무는 별궁을 말한다. 조선시대 행궁은 화성(수원) 강화 전주 의주 양주 부안 온양 등이 있었다.
남한산성의 행궁은 지리적으로 한양에 가까워 위급한 상황이 됐을 때 나라를 통치할 수 있도록 종묘와 사직을 갖췄다.
1624년 인조는 유사시 왕실 피란처를 마련하기 위해 남한산성 축조를 시작했고 이듬해 행궁이 완공됐다. 인조는 1636년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군대에 맞서 47일간 이곳에서 버티다 결국 삼전도에서 항복했다.
지난해 복원된 행궁은 남한산성의 상징적인 공간이 온전한 모습을 되찾았다는 의미가 있다. 전체 252.5칸 가운데 임금의 거처가 있는 상궐 72.5칸은 2002년 10월 복원됐다. 이어 2004년 8월에는 종묘를 모신 좌전 26칸이 복원됐다. 마지막으로 2010년 임금과 신하들이 정사를 논하던 하궐 154칸이 완공됐다.
이 책은 남한산성을 걸으면서 역사와 유적을 탐방할 수 있게 구성됐다. 핵심인 행궁을 둘러보고 난 후 산성 안의 문화유적을 살핀다. 이후 우익문→지화문→좌익문→전승문→우익문으로 이어지는 성곽을 걸으며 남한산성을 조망할 수 있다. 신영주 글, 최진연 사진. 1만3000원.

 

< 허운주 기자 apple297@donga.com >

어린이동아 취재팀 kid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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