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청각 전경. 안동시 제공 |
낙동강을 따라가다 보면 안동 임하댐 아래서 강은 북쪽으로 방향을 튼다. 서쪽 철길 너머 경사 터에 보물 제182호 임청각이 있다. 임청각은 고성 이 씨 종택(宗宅·종가가 대대로 사용하는 집)이다. 1519년 지어 임진왜란 후 두 차례 중수(건축물을 헐고 고침)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8·15 경축사에서 독립운동가 석주 이상룡 선생 본가인 임청각에 얽힌 사연을 말했다.
이상룡 선생은 독립운동을 위해 우당 이회영 일가가 압록강을 건넌 직후 전 재산을 처분했다. 1911년 1월 노비문서를 불사른 뒤 50여 집안사람들과 함께 서간도(중국 동북지역)로 갔다. 망국(망한 나라)의 한을 품고 온 500여 동포와 함께 류허 현에 한인촌을 세웠다. 독립운동과 이주동포 지원을 위해 자치기구인 경학사를 조직하고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길러냈다. 경학사 대표로 추대된 선생은 1925년 상하이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내각제에서의 대통령)을 맡은 바 있다.
서간도 독립운동 주축인 선생 집안에선 독립유공자만 9명이 나올 정도로 독립운동가가 많았다. 일제는 보복으로 중앙선 철도를 놓으면서 임청각을 없애려 했다. 고성 이 씨 문중(집안)과 시민 반발이 거셌다. 그러나 일제는 집요했다. 집을 훼손할 속셈으로 철길이 마당을 관통하도록 설계를 바꿨다. 짧은 10여 ㎞ 구간을 두 차례나 급하게 휘어지게 만들었다. 공사비도 몇 배 더 들었다. 철길 탓에 낙동강과 이어진 임청각 절경(훌륭한 경치)이 훼손됐다. 지금은 99칸 중 70칸만 남았다.
일제가 만주를 점령한 뒤 선생은 “국토 회복 전에는 내 해골도 못 옮긴다”는 비장한 유언을 남기고 1932년 74세로 영면(영원히 잠듦)했다. 선생과 마찬가지로 재산과 지위를 내던지고 교육사업과 항일무장투쟁에 헌신한 9세 아래의 이회영도 그해 타계(세상을 떠남)했다. 두 분의 뼈저린 애국 희생정신에 고개가 숙여진다.
동아일보 8월 16일 자 최영훈 논설위원 칼럼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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