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키히토 일왕이 조기퇴위 의사를 밝히는 영상이 일본 도쿄 시내 대형스크린을 통해 방송되고 있다. 도쿄=AP뉴시스 |
아키히토 일왕(일본의 왕)이 어제 국민에게 보내는 비디오 영상메시지를 통해 “차츰 진행되는 신체의 쇠약(힘이 쇠하고 약함)을 생각할 때 몸과 마음을 다해 상징으로서의 책무를 수행하는 것이 어려워지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물러날 뜻을 전했다. 일왕이 살아 있는 동안 퇴위(자리에서 물러남) 의사를 밝히고 양위(자리를 물려줌)하는 것은 에도시대 후반기인 1817년 이후 약 200년 만에 처음이다.
올해 83세인 아키히토 일왕이 지난해 공식 행사에서 순서를 헷갈리는 등 건강 이상 증세를 보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국사를 하면서 일본 헌법 하에 상징으로 자리매김한 천황(일본에서 그 왕을 이르는 말)의 바람직한 위상이 어때야 할지를 날마다 생각해왔다”는 대목을 보면 또 다른 메시지를 읽을 수 있다.
일왕이 ㉠조기(이른 시기) 퇴임 의사를 밝힘으로써 아베 신조 총리가 추진 중인 개헌(헌법을 고침)에 제동(멈추게 함)을 거는 것이다. 일왕이 세상을 떠난 뒤에만 후임자가 즉위할 수 있도록 한 현행 왕실 전범(典範·법이나 규범)의 개정 작업에 들어가면 개헌은 아베 총리 임기 내 어려워질 가능성이 크다.
일본 헌법 1조는 ‘일왕을 일본국의 상징이자 일본 국민통합의 상징’으로 규정하고, 9조에서 ‘전쟁 포기’를 명시하고 있다. 아키히토 일왕은 2013년 12월 ㉡팔순 기자회견에서 “평화와 민주주의를 지켜야 할 소중한 것으로 삼아 일본국 헌법을 만들었다”며 ‘전쟁할 수 있는 나라’로의 개헌에 반대한다는 뜻을 분명히 한 바 있다.
그러나 개헌안은 일왕을 ‘국가의 원수(한 나라에서 으뜸가는 권력을 지니면서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로 명문화(문서로써 명백히 함)하는 등 정치성을 부여하고 교전권(나라 사이에 문제가 생겼을 때 전쟁을 통하여 이를 해결할 수 있는 권리)을 명시해 평화헌법을 무력화할 태세다. 이 때문에 일각에선 아베 내각이 일왕을 중심으로 하는 과거 국가 총동원체제로 돌아가려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끊이지 않고 있다.
아키히토 일왕은 1989년 즉위(자리에 오름) 이후 일본사회 일각에서 과거 침략전쟁의 역사를 부정하는 풍조(시대에 따른 세태)에 우려를 나타내어왔다. 1990년에는 당시 노태우 대통령에게 “우리나라(일본)로 말미암은 불행한 시기에 ㉢귀국(상대편의 나라를 높여 이르는 말)이 고통을 맛본 걸 생각하면 가슴 아프고 통석(몹시 애석함)의 염(생각이나 마음)을 금할 길 없다”고 밝혔다. 일왕가문의 핏속에 백제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말할 만큼 한국에 대한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감추지 않았던 아키히토 일왕이다.
아베 총리는 일왕의 메시지를 진심으로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과거 *군국주의 일본의 침략을 받았던 주변국들을 자극하는 일은 삼가야 할 것이다.
동아일보 8월 9일자 사설 정리
※ 상식UP
군국주의: 국가의 가장 중요한 목적을 군사력에 의한 발전에 두고, 전쟁과 그 준비를 위한 정책이나 제도를 국민 생활 속에서 최상위에 두려는 것. 제2차 세계 대전 때의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이 대표적 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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