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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화문 앞 으뜸 자리에 있던 의정부는?
  • 조윤진 기자
  • 2021-06-24 17: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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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역사박물관 옥상에서 내려다 본 의정부 터 전경​



의정부 터 발굴지 위치를 표시한 지도. 서울시 제공​


조선의 궁궐이었던 경복궁(서울 종로구) 정문을 등지고 서서 왼편을 바라보면, 찻길 건너편 시야를 가로막는 거대한 가림막이 눈에 띈다. 가림막이 설치된 지 벌써 5년. 서울 도심 한복판에 설치된 펜스 너머에는 대체 무엇이 있을까.

공사 현장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 이곳은 조선시대 신하가 모여 나랏일을 논의하는 당대 최고의 행정기관(국가 업무를 맡아 처리하는 기관)인 ‘의정부’가 있던 자리다. 의정부는 오늘날로 치면 국무조정실, 국무총리비서실, 국회, 대법원, 헌법재판소, 중앙선거관위원회 등의 역할을 했다. 그러나 건물의 원형은 모두 없어지고 현재는 ‘터(건물을 지었던 자리)’만 남은 상태다. 건물을 세울 때의 가장 기초적인 부분이 되는 기단과 초석 그리고 그것들을 지탱하는 돌무더기만 있다. 지난해 9월 ‘의정부 터(의정부지)’는 국가지정문화재(사적 제558호)가 됐다.


서울시는 지난 2019년 의정부 터 유적 발굴을 모두 마치고 지금은 복원ㆍ보존 작업에 한창이다. 서울시는 지난 21∼23일 시민들을 대상으로 의정부 터 유적 현장 공개 행사를 열고 의정부의 위상과 흔적에 대해 설명했다. 최근 이 현장을 찾아 의정부의 과거와 현재를 돌아봤다.


조선의 엘리트가 모였던 의정부

의정부 터 복원 현장 내부​

 


‘광화문외제관아실측평면도’에 나온 의정부 건물 배치도​

복원 현장에 들어가기 전 의정부 터와 인접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서울 종로구) 옥상(8층)에 오르자 1만 1300㎡ 규모의 땅이 한 눈에 들어왔다. 이날 강연자로 나선 홍순민 명지대 교수(문화자원기록전공)는 “우리가 내려다보는 것은 당시 의정부가 차지했던 땅의 일부”라며 “지금은 흔적밖에 남지 않았지만 본래는 경복궁 앞에 있는 큰 도로까지가 전부 의정부 자리였다”고 했다. 궁궐 바로 앞 으뜸가는 자리에 있는 의정부가 당시 얼마나 대단한 위상을 가졌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총백관 평서정 리음양 평방국.” 마법 주문처럼 들리는 이 글귀는 조선시대의 최고 법전인 ‘경국대전’에 남은 의정부의 역할에 대한 기록이라고 홍 교수는 설명했다. 그는 “의정부를 이해하려면 이 표현을 알아야 한다”며 “모든 신하를 아우르고 음양(동양에서 세상 모든 것의 기본이 된다고 믿는 2가지 기운)의 조화를 이뤄 나라를 다스리는 기관이라는 의미”라고 했다.


조선의 2대 왕인 정종이 1400년 세운 의정부는 조선이라는 나라를 다스릴 때 왕실 다음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같은 조선 최고의 ‘엘리트’ 집단이 의정부에 있었지만, 오히려 구체적인 역할이 뚜렷하지 않다보니 세월이 흐르며 힘을 잃기도 했다. 그나마 고종이 1865년 경복궁을 중건(왕궁 등을 고쳐 지음)하며 의정부 건물을 다시 지었고, 그 명성을 회복시키려 했다. 지금 남아있는 흔적도 당시 다시 만들어진 건물의 기초 부분이다.


폐허 아니고 역사의 현장!


문화재 보존 업체 관계자가 초음파 장비를 이용해 돌의 풍화 정도를 측정하는 모습​

의정부 터를 둘러싼 가림막을 지나 마침내 들어선 복원 현장에는 곳곳에 돌무더기가 쌓여 있었다. 돌무더기 사이로 성인 남성이 두 팔을 벌려도 끌어안을 수 없을 정도의 거대한 정육면체 바위가 일렬로 늘어서 있기도 했다. 돌무더기 주변에는 바람이나 비에 무너지지 않도록 복원팀이 쌓아놓은 옥색 모래주머니도 눈에 띄었다.

폐허 같은 현장에서 지도와 설명 없이는 건물의 세부적 위치를 추정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었다. 영의정과 좌의정, 우의정이 모여 회의하던 정본당은 온 데 간 데 없고 돌무더기만 가득했다. 정본당을 가운데 두고 오른편에는 종1품 및 정2품이 나랏일을 하던 협선당의 자리. 왼편은 재상들의 거처(자리 잡고 사는 장소)였던 석획당의 터가 남아 있었다.


석획당이 있던 자리에는 건물을 튼튼하게 받쳐주기 위한 시설인 ‘기단’이 남아 있었다. 조치욱 서울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이 돌은 건물 기둥이 흔들리지 않도록 설치한 기단”이라며 “지금 우리가 딛고 있는 이 땅이 과거에는 지하였던 셈”이라고 설명했다.

의정부 터에 남아있는 기단, 초석 같은 석재(돌로 된 재료) 문화재 분석에는 과학기술이 적용된다. 문화재 보존 업체 관계자가 양쪽 끝이 선으로 연결된 펜처럼 생긴 장비를 각각 초석에 가져다 대자 모니터에 곧장 초음파의 속도가 나타났다. 초음파가 돌의 끝까지 전해졌다가 돌아오는 데 걸리는 시간이 길면 풍화(햇빛, 공기, 물의 작용으로 파괴되거나 분해됨)가 많이 진행돼 금이 가거나 약해졌다는 의미다. 이밖에도 건강검진을 위해 위나 장에 작은 카메라가 달린 호스를 집어넣는 내시경 장비도 동원한다. 돌의 갈라진 틈을 자세히 살피기 위해서다.​

▶어린이동아 조윤진 기자 koala624@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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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동1
    • Sunjinnoh1   2021-06-25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들에서 많이 보았었는데, 지금의 광화문 앞이 예전에 신하들이 모여 나랏일을 논의하는 당대 최고의 행정기관이던 의정부가 있던 자리라고 하니 놀랍습니다. 지금은 건물의 기초인 기단, 초석, 돌무더기만 있지만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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