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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달의 문화인물/고하 송진우]독립건국에 힘쓴 민족의 등불
  • 어린이동아 취재팀
  • 1997-12-05 11: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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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문화인물/고하 송진우]

[이달의 문화인물/고하 송진우]독립건국에 힘쓴 민족의 등불

12월의 문화 인물로 선정된 고하 송진우(1890∼1945)선생. 교육가이자 정치인 그리고 일제에 항거하면서 진정한 언론인상을 정립했던 애국지사. 고하는 고종 27년인 1890년 음력 5월 8일 전남 담양군 고지면 손곡리 ‘5대가 함께 사는 명가’에서 태어나 만 3살 때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10년 동안 한학을 공부한 고하는 의병 투쟁가 기삼연 선생에게 민족주의적 가르침을 받았다. 고하는 17살에 새 학문을 배워야 겠다는 결심을 하고 창평 영학숙에 들어갔다. 여기서 동아일보를 창간한 인촌 김성수 선생을 만나 우정을 키워가기 시작했다. 다음 해 고하와 인촌은 일본 유학을 결심, 어른들 몰래 일본에 건너가 도쿄의 와세다 대학 정치경제학부에 입학한 뒤 서양 학문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고하는 메이지 대학으로 옮겨 법학을 공부했다. 고하는 조선유학생연합친목회의 총무를 맡아 일본 문부성에 찾아가 싸워 관비 유학생들의 학비를 받아내고, ‘학지광’이라는 잡지를 창간하는 등 유학생들의 편의를 위해 분주히 활동하였다. 1915년 대학을 졸업한 후 고하는 바로 귀국, 인촌이 이미 민족학교로 키우고 있던 중앙학교에 몸담으면서 학생들에게 민족애와 조국애를 불어넣었다. 그는 앞으로 나라를 짊어질 청소년을 길러내는 것이 조국 광복의 주춧돌을 쌓는 길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고하는 곧 단군과 세종대왕, 성웅 이순신을 민족의 삼성(3명의 성인)으로 정하고 그들의 업적을 기리고 그 정신을 본받기 위해 ‘삼성사 건립 운동’을 전개하였지만 총독부의 방해로 실패했다. 독립운동을 준비하던 고하는 1919년 일본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에 자극을 받은 후 3·1 독립 운동 추진에 힘썼다. 3·1운동은 제1진과 제2진으로 추진되었는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최남선·한용운 선생을 포함한 33명은 제1진이며, 고하는 17명이 있는 제2진에 속했다. 고하는 3·1운동 이후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재판에서 “독립 운동은 조선 사람으로서 당연히 할 일”, “독립 운동에 대해서는 절대적으로 찬성”이라며 당당히 맞섰다. 그는 체포된 지 1년 7개월 만에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가 확정되어 풀려났다. 1920년 인촌이 동아일보를 창간한 이듬해 고하는 ‘동아일보’제3대 사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취임식에서 동아일보를 ‘2천만 민중의 공유물’이라며 민족과 영원히 운명을 같이 할 것을 강조했다. 취임 후 그는 해외 취재에 크게 관심을 두어 통신과 교통이 나쁜 환경에서도 하와이, 워싱턴 등에 특파원을 파견하였고, 1923년 관동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도 도쿄에 기자를 특파하여 취재와 위문을 겸하게 했다. 또 1925년에는 자신이 직접 특파원의 자격으로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열린 ‘제1회 범태평양기독교청년대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1926년 3·1운동 제7주기를 맞아 소련 국제농민회본부에서 조선 농민에게 보낸 메시지를 동아일보에 싣자 일본 총독부는 위법이라 하여 고하를 구속하였다. 고하는 이듬 해 2월에 출감한 뒤 8개월 후 다시 ‘동아일보’ 사장으로 선출되었다. 29년 그는 3·1운동 기념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인도의 애국자이자 독립투사인 시인 타고르를 초청할 계획을 세웠다. 타고르는 일정을 다음으로 미루는 대신 ‘동아일보’를 통해 조선민족을 위한 시 한 편을 보냈다. 이 시에서 바로 그 유명한 ‘동방의 밝은 빛’이라는 조선을 칭송하는 글귀가 담겨 있다. 3·1운동 10주년 기념 사업을 추진하던 중 총독부의 미움을 사 무기 정간을 당한 후 가을에 동아일보가 복간되자 고하는 문화운동을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고하는 민족주의의 길을 문화에서 찾았다. 동아일보는 ‘삼성사 건립 운동’, ‘조선민립대학운동’, ‘조선물산장려운동’, ‘이충무공유적보호운동’, ‘문맹퇴치 운동’을 통해 학생이 봉사하도록 동기를 부여, 2천만 인구 가운데 77.7% 문맹자들을 대상으로 한글 교육 등 계몽 교육과 문화와 생활을 개조하는데 힘썼다. 1936년 8월 유명한 일장기 말소사건이 일어났다. 동아일보가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대회에서 금메달을 딴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 있는 일장기를 말소한 채 발간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고하는 사장직에서 물러나고 동아일보는 무기 정간을 당했으며 그 뒤 1940년 일본은 동아일보를 폐간시켰다. 이후 고하는 바로 은거 생활에 들어갔다. 일본은 온갖 유혹을 했지만 고하는 병을 핑계로 절대 타협하지 않았다. 그는 1945년 조선이 독립된 후에도 정권은 해외의 독립 지사나 임시정부가 되어야 한다는 소신으로 일본의 정권 인수 제의에 선뜻 동의하지 않았다. 고하는 광복 후 대한민국 임시 정부 환국 환영회를 조직하여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환국하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또 그는 연합국들이 경제적·군사적으로 원조만 해준다면 독립 국가로 훌륭히 자립할 수 있다는 민족적인 자신감으로 차 있었다. 그 해 9월 고하는 한국민주당 수석 총무로 추대된 후 공산주의를 비판하는 한편 해외에 나가 있는 우리 동포들의 귀국을 주선할 것을 미국에 간청했다. 그는 이 무렵 복간된 동아일보 사장으로 다시 취임했다. 당시 신탁 통치에 대한 찬반으로 시국이 위태로웠을 때 고하는 반대는 하지만 미국과의 마찰을 피하자는 주장을 하여 ‘신탁통치를 찬성하는 사람’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그는 신탁통치를 조용히 피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던 중 1945년 12월 한현우를 비롯한 6명의 암살자들에 의해 목숨을 잃고 말았다. 당시 나이 55살. “내 집은 신문사요, 신문을 떠난 송진우는 생각할 수 없소”라며 영원한 언론인의 본분을 잊지 않았던 고하 송진우 선생은 참기자로서의 역량은 물론 인격 수양을 일생의 최대 과제로 삼았던 진정한 지도자상을 제시해 주었다. 〈유수나 기자〉 어린이동아 취재팀 kid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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