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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rt&History] 빛나는 승리 거둔 독립군
  • 장진희 기자, 이지현 기자
  • 2019-10-20 15:4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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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그날] 역사 속 이번 주엔 어떤 일이 있었을까? 기록이 뚜렷하게 남아있는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시작으로 근현대까지의 같은 날 있었던 사건들을 한 주 단위로 파악합니다. 이번 주는 10월 20∼26일 발생했던 역사적인 사건들을 살펴보세요.


중국 청산리에 있는 청산리항일대첩기념비. 동아일보 자료사진


1920년 10월 21일, 독립군이 청산리 전투에서 승리함

1910년 일본에 의해 강제로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된 이후, 의병들은 만주의 북간도와 서간도, 러시아 연해주 등으로 이주해 독립군으로 활동했습니다.

1910년대에 독립군을 양성하고 기지를 건설하는 기간을 거쳐 1920년대부터 무장(전투 장비를 갖춤) 독립운동이 활발해졌습니다. 1915년에는 총사령은 박상진, 부사령은 김좌진으로 하는 군대식 조직인 대한광복회가 대구에서 창설됐습니다. 이들은 전국 8도에 지부를 두고 군자금을 모으고 독립군을 양성하는 등 항일 투쟁을 벌였지요.

1919년 3·1 독립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세워지면서 독립에 대한 열망은 날로 뜨거워졌습니다. 만주 지역에서 독립군의 무장 항쟁도 활발해졌지요. 1920년 6월 만주 봉오동 (현재 중국 지린성 봉오동)에서 독립군의 연합부대와 일본군이 벌인 전투에서 홍범도가 이끈 대한독립군 등이 일본을 격파하고 큰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봉오동 전투’는 만주에서 한국 독립군과 일본군 사이에 벌어진 최초의 대규모 전투였습니다. 이 전투에서 승리하며 독립군의 사기가 크게 높아졌습니다.

독립군의 활약에 위협을 느낀 일본은 간도 지방의 독립군을 처단할 방법을 모색했습니다. 일본은 중국의 마적단(말을 타고 떼를 지어 다니는 도둑)에게 일본 영사관을 공격하도록 했습니다. 마적단 토벌을 핑계 삼아 독립군 공격을 시작하려는 속셈이었지요. 일본은 무려 2만5000명의 군사를 출동시켰고 이를 알고 피신하던 독립군과 만주 청산리에서 만나게 됩니다.

김좌진이 이끌었던 북로군정서 부대는 백운평 골짜기에 진을 치고 숨은 뒤 일본군이 들어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일본군이 도착하자 기습적으로 공격을 퍼부었고 물러나는 길이 좁아 우왕좌왕하던 일본군은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후 청산리 일대에서 크고 작은 전투가 연이어 벌어졌습니다. 약 일주일간 이어진 전투에서 독립군은 일본군에 맞서 용감하게 싸웠고 대부분 전투에서 승리하게 됩니다. 독립군은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 새벽까지 10여 차례 전투를 벌인 끝에 일본군 1200명을 해치웠습니다.​


독립군을 이끈 김좌진 장군

[한 뼘 더] 김좌진 장군의 업적은?

1915년 대한광복회에 가입하며 무장 항일운동을 시작한 김좌진 장군(1889∼1930)은 1918년 일본의 감시를 피해 만주로 건너갔습니다.

1919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권고를 받아들여 북로군정서의 총사령관이 되어 1600명의 독립군을 지휘했습니다. 독립군 양성을 위한 사관연성소를 설치하고 소장을 지내며 1920년 9월에는 제1회 졸업생 298명을 배출시키기도 했지요. 1920년 10월에는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끌었고 이후 약 10년 간 본격적인 항일전투를 전개했습니다.

김 장군은 만주에서 무장투쟁을 이어가면서도 국내에 밀사와 공작대를 꾸준히 파견했습니다. 독립을 이루기 위해서는 궁극적으로 국내로 진출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 급속하게 퍼지던 공산주의 사상에 강력하게 반대했던 그는 공산주의자들과 대립했고, 결국 1930년 고려공산당 회원인 한 청년의 총에 맞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박정희 기념관에서 사람들이 전시물을 살펴보는 모습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사망에 전국(제주도 제외) 비상 계엄 공포

박정희 전 대통령은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오래 대통령을 지낸 인물입니다. 1963년 5대 대통령에 취임하고 장기집권을 위한 3선 개헌을 통해 1979년까지 재임했지요.

군인이었던 그는 1961년 제2군 부사령관으로 재임하던 중 5·16 군사정변을 주도했고 1962년 윤보선 대통령이 사임하자 대통령권한대행을 맡게 됩니다. 1963년 민주공화당에 입당해 총재가 되었고 그해 12월 제5대 대통령에 취임했지요.

그는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통한 경제 성장과 사회 인프라 확충에 힘을 쏟았습니다. 여론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일협정에 정식 서명하고 베트남 전쟁에 파병하며 외국자본을 모으기도 했지요.

그러나 장기집권에 대해 국민들의 불만이 커지고 민주화운동으로 지지도가 떨어지자 박정희 대통령은 ‘긴급조치’를 발동해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학생들을 탄압했습니다. 이에 대한 불만이 날로 높아지던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전 대통령은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의 저격으로 서거(세상을 떠남)하게 됩니다.​


태조 이성계의 어진.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1394년 음력 10월 25일, 태조 이성계, 한양으로 수도를 옮김

조선 1대 왕인 이성계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최고 의사결정기관인 도평의사사에 한양(지금의 서울)으로의 천도(수도를 옮김)를 명했습니다.

한양천도에는 정치적, 사회적 혼란기마다 언급되었던 풍수지리설이 큰 영향을 미쳤지요. 개성의 지덕(地德·땅의 좋은 기운)이 이미 다했기 때문에 다른 곳으로 수도를 옮겨야 한다는 논리로, 이에 한양이 주요 후보지로 거론되었습니다.

하지만 한양을 도읍지로 선택한 실질적인 요인은 한양이 갖추고 있는 인문·지리적 조건이 좋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한양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서쪽에는 바다, 남쪽으로는 한강이 흐르고 있어 무엇보다 군사적인 방어에 유리했지요. 또한 곡식 같은 세금을 거두는 데에 주로 육로보단 수로를 이용했던 때이므로 한양은 서해의 바다를 이용하기에도 좋은 곳이었습니다.

1394년 10월, 드디어 조선왕조는 새 도읍지인 한양으로 천도하게 됩니다. 이를 시작으로 서울은 본격적으로 한반도의 정치적, 경제적 중심으로 성장하게 되었지요.​

▶어린이동아 장진희 기자 cjh0629@donga.com, 이지현 기자 easy27@donga.com

위 기사의 법적인 책임과 권한은 어린이동아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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