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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rt&History] 진실 밝혀진 제주 4·3 사건
  • 장진희 기자
  • 2019-10-13 15:5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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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10월 15일, 정부가 제주 4·3 사건 공식 진상조사 보고서 확정해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입니다. 기나긴 역사를 간직한 우리나라에선 과거에 어떤 중대한 사건들이 있었을까요? 매주 월요일 선보이는 ‘역사 속 그날’ 코너를 통해 역사 지식을 쑥쑥 키워보세요. 역사 속 이번 주엔 어떤 일이 있었을까? 기록이 뚜렷하게 남아있는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시작으로 근현대까지의 같은 날 있었던 사건들을 한 주 단위로 파악합니다. 이번 주는 10월 13∼19일 발생했던 역사적인 사건들을 살펴보세요.​


제주도 사람들에게 1945년 광복은 특별했습니다. 제주도가 지리적으로 동북아시아의 요충지인 까닭에 일본군은 곳곳에 비행장을 만들고 폭격에 대비해 굴을 파며 섬을 훼손시켰습니다. 이 과정에서 주민들은 강제로 동원되어 공사를 해야 했지요. 공사에 나섰다가 목숨을 잃은 사람도 많았습니다. 바라던 광복의 기쁨도 잠시 1948년 미국과 이승만 당시 대통령은 남한 단독 총선거를 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통일 정부가 수립되길 원했던 제주도 사람들은 남한만의 단독 선거를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습니다. 경찰과 군인들은 시위를 벌이는 제주도 사람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았고 닥치는 대로 잡아가 고문했습니다. 1948년 4월 3일 참다못한 제주도 사람들은 한 마음이 되어 미군 철수와 단독 선거 반대를 주장하며 들고 일어났습니다. 경찰과 군은 무기가 없는 사람들에게까지도 총을 쏘며 강하게 진압했습니다.


제주 4·3 평화공원 기념관 내 희생자들의 사진이 전시된 터널. 동아일보 자료사진​


평화공원 내 제주 지역 행방불명 희생자들의 표석​

주민들은 한라산으로 들어가 숨었지만 군인들이 쫓아와 산간 마을을 불태우고 보이는 대로 사람들을 죽게 했습니다. 결국 1948년 11월 17일, 제주 전역에 계엄령(비상시에 헌법 일부 효력을 중지하고 군사권을 발동하는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 선포됐습니다. 군인들이 끊임없이 무고한 주민들을 집단으로 살상한 끝에 마을 자체가 없어져버리기도 했습니다. 이후 일부 무장대원만이 한라산에 남아 투쟁을 이어갔습니다. 1954년 9월 21일 무장대원을 완전히 토벌(무력으로 응징함)한 정부가 한라산 입산 금지 조치를 해제하면서 제주 4·3 사건은 끝이 났습니다.

제주 4·3 사건은 오랫동안 진실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아 피해 규모도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1980년 후반부터 이 사건을 밝히려는 사람들의 노력으로 조사가 이뤄졌고 1990년대 후반부터는 정부 차원의 진상 규명 작업이 진행됐습니다. 1999년 ‘제주 4·3 사건 진상 규명 및 피해자 명예 회복을 위한 특별법’이 국회에서 통과되며 2003년 10월 15일에는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보고서가 확정됐습니다.

제주 4·3 특별법은 제주 4·3 사건을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 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과 그 진압 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2014년에는 4월 3일을 국가추념일로 지정하기도 했습니다. 정부가 확인을 거친 4·3 사건 관련 희생자는 1만4363명, 유족은 6만4378명입니다.

[한 뼘 더] 제주도 다크 투어리즘이란?​

‘제주도’ 하면 무엇이 떠오르나요? 유채꽃이 아름답게 핀 들판, 시원한 바람, 물질하는 해녀….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감상하는 것도 좋지만 제주 4·3 사건 현장 등을 둘러보는 ‘다크 투어리즘’을 떠나는 것을 추천합니다. 다크 투어리즘은 잔혹한 참상이 발생한 역사적 장소나 현장을 둘러보는 여행을 말합니다.

비영리단체 ‘제주다크투어’는 제주 4·3 사건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게 제주 4·3 평화공원을 방문해 깊이 있는 해설을 들으며 사건에 대해 이해할 것을 권합니다. 사건 당시 주민들이 숨어 살았던 자연동굴인 선흘 토틀굴에 방문해 어떻게 생활했을지 돌아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요. 4·3 사건으로 가장 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마을인 북촌 너븐숭이 4·3기념관도 있습니다.​


2006년 10월 14일​ 반기문, 제8대 유엔 사무총장에 선출​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선출된 후 한국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새로운 세기 유엔(UN·국제연합)의 역할은 새로운 도전 속에서 인도주의가 더욱 증진될 수 있도록 국가 간 시스템을 강화하는 것입니다.”

2006년 10월 14일 제8대 유엔 사무총장으로 공식 선출된 반기문 당시 외교통상부 장관은 수락연설을 통해 이렇게 밝혔습니다. 그는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유엔 사무총장으로 선출됐습니다. 아시아인으로는 미얀마 출신의 우 탄트 제3대 사무총장에 이어 두 번째였지요.

반 전 사무총장의 연임 추천 결의안이 2011년 6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만장일치로 통과되면서 2016년 12월 31일까지 유엔 사무총장을 지냈습니다. 약 10년간 사무총장으로 재임하면서 그가 남긴 최대 업적은 ‘파리기후협정’을 채택시킨 것입니다. 2015년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1)에 참가한 195개국은 ‘지구의 평균 온도가 산업화 이전보다 1.5도 이상 오르지 않도록 노력한다’는 것에 합의했습니다. 지구온난화 속도를 늦추기 위해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여야 한다는 데 뜻을 같이 한 것이지요.​


1884년 음력 10월 17일 김옥균·박영효, 갑신정변 일으킴​


갑신정변이 일어난 우정총국의 전경. 문화재청 제공​


고종 때(조선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 제1대 황제)인 1882년, 나라가 신식 군대를 우대하는 것에 분노한 구식 군대는 참다못해 관리들의 집에 불을 지르고 일본 관리들을 죽이는 난을 일으켰습니다. 이것이 바로 ‘임오군란’.

임오군란을 겪은 이후 개화파는 왕비를 포함한 민씨 일가와 협력해 개혁을 단계적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한 온건 개화파와 청나라에 대한 사대관계를 청산하고 조선의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추진하려고 한 급진 개화파로 나뉘게 됐습니다.

김옥균, 박영효 같은 양반 출신 지식인들은 우정국 개국 축하연이 있는 날을 틈타 정변을 일으켰습니다. 김옥균은 창덕궁으로 가 청이 난을 일으켰다고 거짓말을 하고 고종과 왕후 민씨를 경우궁으로 피신시켰습니다. 이 사이 정변을 일으켜 새로운 정부를 수립한 개화당은 근대적 개혁을 펼칠 준비를 마쳤습니다. 사태를 파악한 청군이 갑신정변 세력을 처단하려 했고, 약속과 달리 일본이 이들을 돕지 않아 계획은 수포(물거품)로 돌아갔습니다. 이들이 만든 개혁 정강 14개조에는 신분제를 없애고 탐관오리를 처벌하라는 등의 내용이 담겼습니다. 백성의 지지를 이끌어내지는 못했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정치 개혁 시도였다는 점에서 갑신정변은 그 의미가 있습니다.​

▶어린이동아 장진희 기자 cjh062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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