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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rt&History] 폭정 끝에 쫓겨난 연산군
  • 이지현 기자, 장진희 기자
  • 2019-09-01 16: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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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6년 음력 9월 2일 중종반정으로 연산군 폐위됨

역사 속 이번 주엔 어떤 일이 있었을까? 기록이 뚜렷하게 남아있는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시작으로 근현대까지의 같은 날 있었던 사건들을 한 주 단위로 파악합니다. 이번 주는 9월 1~7일 발생했던 역사적인 사건들을 살펴보세요.​


연산군(왼쪽)과 그의 부인 신씨의 묘. 동아일보 자료사진​


조선 10대 왕이었던 연산군은 폭정(포악한 정치)으로 인해 신하들뿐만이 아니라 많은 백성의 미움을 사게 됩니다. 연산군은 친어머니 윤씨가 쫓겨나 사약을 받고 숨을 거둔 일이 있고 난 뒤 자신에게 비판적인 관리와 선비들을 모두 벌주거나 내쫓았지요. 나랏일은 관심 밖이었고 매일 잔치를 열고 즐기는 데 바빴습니다. 임금이 학자들과 공부하는 경연을 폐지하고, 최고 유학 교육 기관인 성균관을 먹고 즐기는 곳으로 만들었지요.

이에 조선 전기의 문신이었던 성희안과 무신이었던 박원종은 1506년 연산군의 폐위(왕이나 왕비의 자리를 없앰)를 밀약(몰래 약속함)하게 됩니다.

두 사람은 왕의 신임을 받던 신하들의 도움을 얻어 왕이 경기 연천군 임진강변에서 유람(돌아다니며 구경함)을 하러 가기로 한 날에 맞추어 거사를 치르게 됩니다. 권력을 쥐고 있던 연산군의 측근들을 죽이고 궁궐을 에워싼 뒤 죄 없이 옥에 갇혀 있던 자들을 풀어주었지요. 박원종 등은 군사를 몰아 텅 빈 경복궁에 들어가서 성종의 계비(임금이 다시 장가를 가서 얻은 아내)이며 진성대군의 어머니인 대비 윤씨의 허락을 받아 연산군을 폐하여 강화도에 안치(조선시대에 먼 곳에 보내 다른 곳으로 옮기지 못하게 주거를 제한하던 일)했습니다. 9월 2일 진성대군이 경복궁 근정전에서 왕위에 올랐고 그는 조선왕조 제11대 왕인 중종이 되었지요. 이 정변을 중종반정이라고 합니다. 연산군은 강화도에 안치된 지 두 달 만에 병을 얻어 세상을 뜨게 됩니다.​

[한 뼘 더] ‘조(祖)’와 ‘종(宗)’의 차이는?​

조선시대 국왕들은 대부분 그 호칭 끝에 ‘조’나 ‘종’이 들어갑니다. 조와 종은 무슨 뜻일까요? 조와 종은 왕이 세상을 떠난 뒤에 붙이는 묘호입니다. 황제나 왕이 죽은 뒤 종묘에 신위(죽은 사람의 영혼이 의지할 사진이나 글귀)를 모실 때 붙이는 호이지요.

대체로 나라를 세운 공이 있거나 반정(옳지 못한 임금을 폐위하고 나라를 바로 세움)이나 국난(나라의 어려움) 극복을 통해 중단되었던 나라의 정통을 다시 세운 왕에게는 조의 묘호를, 왕위를 정통으로 계승한 왕 또는 덕이 출중한 왕에게는 종의 묘호를 붙였습니다.

반정을 통하여 왕위에 오른 중종의 경우는 원래 중조의 묘호를 붙이려 했으나 성종의 직계(친자관계로 직접적으로 이어진 계통)로서 정통을 이었다하여 중종이라 칭하게 되었지요. 광해군과 연산군은 폐위된 왕으로 묘호가 붙지 않았습니다.​

1948년 9월 7일​ 국회 본회의에서 ‘반민족 행위 처벌법’ 통과​


일제강점기 친일 행위자들이 법정에 끌려가고 있다​

‘일본 정부와 통모(남몰래 공모함)하여 한일합병에 적극 협력한 자, 한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조약 또는 문서에 조인한 자 및 모의한 자는 사형 또는 무기징역에 처하고 그 재산과 유산의 전부 혹은 2분의 1이상을 몰수한다.’

1948년 9월 22일 공포(널리 알림)된 ‘반민족 행위 처벌법’ 제1조입니다. 앞서 같은 해 5월 10일 총선거를 통해 한국 헌정사상 최초로 출범한 국회는 일제의 식민 통치에 도움을 준 친일파를 처벌해야 한다는 여론을 받아들입니다. 이에 7월 17일 발표한 제헌 헌법에 일제강점기의 반민족 행위를 처벌할 수 있다는 근거 규정을 마련했습니다.

1948년 8월 5일 국회 본회의에 처음 발의되어 여러 차례 수정을 거친 끝에 같은 해 9월 7일 본회의에서 절대다수의 찬성으로 반민족 행위 처벌법이 통과되기에 이릅니다. 공포된 후 한 달 뒤인 10월 22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설치됐습니다. 그러나 친일 경력이 있는 경찰이 반민특위 위원을 공격하는 일이 벌어지는 등 이들의 활동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결국 반민특위는 1년도 못가 활동을 마무리 할 수밖에 없었지요.​

1981년 9월 5일​ 박종학 선수 세계유도선수권대회서 한국 첫 금메달​



한국 유도 역사상 국제 대회서 첫 금메달을 딴 박종학 선수​

1981년 네덜란드 마스트리히트 세계유도선수권대회 남자 71㎏급에서 종주국(문화적 현상 등이 처음 시작한 나라)인 일본을 꺾고 우리나라의 방종학 선수가 금메달을 차지하는 이변이 일어났습니다. 세계 대회에서 한국 유도 선수가 금메달을 딴 것은 이때가 처음이라 더욱 값진 성과였습니다.

이후 1983년 청석고(충북 청주시) 감독으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 박종학은 1989년 국가대표 유도 코치로 활동했습니다. 1999~2000년까지는 국가대표 감독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지도자로도 박종학은 이름을 날렸습니다. ‘유도 천재’ 전기영, 2012년 영국 런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송대남 등을 키워냈다고 알려졌지요.

그는 2008년에는 대만 국가대표팀 감독에 임명됐다가 6년 여 만인 지난 2014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현재 청주대(충북 청주시) 체육교육과 교수를 지내고 있습니다.​


▶어린이동아 이지현 기자 easy27@donga.com, 장진희 기자 cjh062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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