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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rt&History] '코리안 특급' 박찬호의 100승
  • 장진희 기자, 이지현 기자
  • 2019-06-02 14:3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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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6월 5일, 텍사스 레인저스 박찬호 100승 달성

[역사 속 그날]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입니다. 기나긴 역사를 간직한 우리나라에선 과거에 어떤 중대한 사건들이 있었을까요? 매주 월요일 선보이는 ‘역사 속 그날’ 코너를 통해 역사 지식을 쑥쑥 키워보세요. 

역사 속 이번 주엔 어떤 일이 있었을까? 기록이 뚜렷하게 남아있는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시작으로 근현대까지의 같은 날 있었던 사건들을 한 주 단위로 파악합니다. 이번 주는 6월 2~8일 발생했던 역사적인 사건들을 살펴보세요.


2017년 박찬호가 ‘2017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을 앞두고 서울에서 열린 평가전 시구행사에서 힘차게 공을 던지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2005년 6월 5일, 텍사스 레인저스 박찬호 100승 달성

“혼자 해낸 100승이 아니다. 아직 갈 길이 멀다.”

한국인 최초로 미국 프로야구 최상위 리그인 메이저리그 무대를 밟은 전설의 투수 박찬호는 2005년 개인 통산(통틀어 계산함) 100승이라는 값진 성과를 일궈냈습니다. 1994년 메이저리그에 진출한지 11년, 1996년 풀타임 메이저리그 생활을 시작한지 9년 만에 땀과 눈물로 쌓아올린 100승인 것이지요. 이날 캔자스시티 로열스와의 원정경기에 선발로 등판한 박찬호는 5회 동안 11안타를 허용하며 6실점했지만, 12대 6으로 앞선 6회 마운드를 중간계투(경기 중반이후를 책임지는 투수)에게 물려주고 내려와 승리투수가 됐습니다.

당시 박찬호는 LA다저스에서 텍사스 레인저스로 이적한지 3년 여 밖에 되지 않은 상황에서 계속되는 부상으로 슬럼프(성적이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현상)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2003, 2004년 통틀어 고작 5승에 그치는 등 성적 부진을 이겨내고 100승을 달성해 그의 화려한 부활을 알렸습니다.

한양대 1학년 때인 1993년 미국 버펄로 유니버시아드(세계학생스포츠대회)에서 최고 시속 156㎞짜리 공을 던지며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를 매료시킨 박찬호. 이듬해 그는 LA다저스와 계약한 뒤 마이너리그를 거치지 않고 메이저리그로 직행하는 영광을 안았습니다. 하지만 데뷔전 이후 17일 만에 마이너리그로 추락했고 피나는 노력 끝에 1996년부터는 풀타임 메이저리거로 활동했습니다. 1997년부터 5년 연속 두 자릿수의 승리를 이끌며 LA다저스의 에이스로 활약하기도 했습니다.

100승을 기록한 2005년 이후 부진과 재기(다시 일어섬)를 반복했던 박찬호는 2010년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아시아 투수로는 최다승인 124승(98패)을 기록했습니다. 같은 해 메이저리그 생활을 청산한 박찬호는 잠시 일본 리그에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2011년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2014년 프로야구 올스타전에 앞서 공식 은퇴식을 갖고 야구인생을 마무리했지요.​

[한 뼘 더] 박찬호의 등번호는?

운동선수에게 유니폼 등번호는 자신을 상징하는 이름과도 같은 것. 아직도 박찬호 하면 ‘등번호 61번’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지요. 박찬호가 처음부터 61번을 원했던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는 충남 공주고 재학 시절 번호인 16번을 원했지만, 그가 LA다저스에 입단했을 때에는 다저스의 투수코치인 론 페로나스키가 이미 16번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16번을 택하는 대신 박찬호는 숫자 순서를 바꿔 61번을 사용하기로 한 것이지요. 이후 메이저리그의 여러 구단을 거쳐 한국의 한화 이글스에서 활동할 때까지 그의 등번호는 쭉 61번이었답니다.​


광화문 광장에 있는 세종대왕 동상


1418년 음력 6월 3일​, 양녕대군이 폐위되고 충녕대군(훗날의 세종대왕)이 왕세자가 됨

조선 3대 왕인 태종은 원경왕후 사이에 4남 4녀를 두었고 효빈 김씨 등 18명의 후궁 사이에서도 8남 13녀라는 많은 자녀를 두었습니다. 정비(왕의 첫 번째 아내)의 장남으로 태어난 양녕대군은 큰 문제가 없다면 태종 이후의 왕의 자리를 자연스럽게 이어받는 것으로 예정됐습니다.

하지만 세자 시절 양녕대군은 아버지 몰래 여러 여성과 어울려 태종의 신임을 잃게 됩니다. 양녕대군은 심지어 세자빈이 아닌 여인이 자신의 아이를 갖도록 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태종은 크게 분노해 양녕대군의 출궁(궁 밖을 나감)을 금지하고 한동안 양녕대군과 직접 마주하지도 않았습니다.

용서를 빌어야 할 순간이었지만, 양녕대군은 도리어 아버지에게 반항하는 내용을 담은 글을 올렸고 결국 양녕대군은 세자에서 폐위(자리를 폐함)됩니다. 양녕대군에 이어 태종의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이 왕세자가 되었고 그는 훗날 조선 4대 왕 세종이 됩니다.​


학생 시위대가 박정희 정부의 한일회담에 반대해 시위하는 모습​

1964년 6월 3일​, 오전 8시부터 서울 일원에 비상계엄 선포(6.3 사태)

1964년 3월 24일. 서울대 등에서 ‘굴욕적인 한일회담 반대’를 외치는 시위가 발생해 전국적으로 퍼졌습니다. 한일회담은 한국과 일본이 과거사를 청산하고 새로운 관계를 수립하기 위해 개최한 회의입니다. 이 시위는 3월 30일 11개 대학의 학생대표들이 박정희 당시 대통령을 만나 요구사항을 전달함으로써 일단 진정되었지요. 그러나 박정희 정부가 한일회담을 계속 추진하자 4월 19일을 전후해 학생시위가 다시 일어났고, 6월 3일에는 1만여 명의 학생과 시민이 시위에 참여했습니다.

규모가 커진 시위대가 청와대를 향해 행진해오자 박정희는 6월 3일 오후 8시 서울시 전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습니다. 계엄령은 국가가 비상 상황에 처했을 때 군사권을 이용해 치안을 유지하는 국가긴급권의 하나로 대통령의 고유 권한입니다.

이후 7월 29일 계엄이 해제될 때까지 집회·시위는 금지되고 대학은 휴교했으며 언론·출판은 정부의 검열을 받게 되었지요.

▶어린이동아 장진희 기자 cjh0629@donga.com, 이지현 기자 easy2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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