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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rt&History] 독립운동 암흑기 밝힌 윤봉길의 의거
  • 장진희 기자
  • 2019-04-28 15:0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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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그날]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입니다. 기나긴 역사를 간직한 우리나라에선 과거에 어떤 중대한 사건들이 있었을까요? 매주 월요일 선보이는 ‘역사 속 그날’ 코너를 통해 역사 지식을 쑥쑥 키워보세요. 

역사 속 이번 주엔 어떤 일이 있었을까? 기록이 뚜렷하게 남아있는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시작으로 근현대까지의 같은 날 있었던 사건들을 한 주 단위로 파악합니다. 이번 주는 4월 28일~5월 4일 발생했던 역사적인 사건들을 살펴보세요.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서울 서초구)에 전시된 윤 의사의 동상. 동아일보 자료사진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일왕 생일 행사장에 폭탄 던져

‘장부출가생불환, 집을 떠나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

1930년 비장한 글을 남긴 채 독립운동에 뛰어들기 위해 만주로 떠난 윤봉길 의사. 윤 의사는 1931년 8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중국 상하이로 활동무대를 옮겼습니다. 같은 해 겨울 김구 선생을 찾아간 윤 의사는 독립운동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겠노라고 다짐합니다.

독립투쟁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하던 중 이들은 중국 상하이 홍커우공원에서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 및 일본군의 상하이 점령 전승 축하 기념식이 1932년 4월 29일 열린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김 선생과 윤 의사는 이날 폭탄을 던져 일제에 피해를 입히기로 결의했습니다.

거사를 사흘 앞둔 1932년 4월 26일 윤 의사는 이 의거(정의를 위해 의로운 일을 도모함)가 사사로운 행동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항일독립운동 단체인 한인애국단에 가입했습니다. 드디어 4월 29일 아침이 밝았고 윤 의사는 물통 모양의 저격용 폭탄과 도시락 모양의 자결용 폭탄을 한 개씩 품에 감춘 채 행사가 열리는 홍커우공원으로 향했습니다.

기회를 엿보던 윤 의사는 일본군의 감시를 피해 단상 위로 올라가 폭탄을 투척했고 이 의거로 일본군 주요 간부 몇몇이 숨졌습니다. 현장에서 체포된 윤 의사는 상하이에 파견된 일본군법회의에 의해 사형을 선고받고 1932년 12월 19일 순국했습니다. 윤 의사는 숨졌지만 이 쾌거로 임시정부 요인들은 다시금 힘을 모으게 됐지요. 

[한 뼘 더] 죽음을 예견했던 윤 의사

윤봉길 의사가 남긴 유품 중 회중시계에는 특별한 사연이 담겼는데요. 의거 당시 그의 품에 있던 회중시계는 원래 김구 선생의 것이지요. 거사 당일 김 선생과 윤 의사는 함께 한 아침식사 자리에서 윤 의사의 제안으로 시계를 맞바꿉니다.

‘백범일지’에 따르면 당시 윤 의사는 “이 시계는 6원을 주고 산 시계인데 선생님 시계는 2원짜리니 제 것과 바꿉시다. 이 시계는 한 시간밖에는 쓸 데가 없으니까요”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듯한 윤 의사의 담담한 태도에 김 선생은 목이 멘 목소리로 “후일 지하에서 만납시다”라고 답할 수밖에 없었지요.​


한국 고아들을 안고 있는 홀트 부부. 홀트아동복지회 홈페이지

1964년 4월 28일, ‘고아들의 아버지’ 해리 홀트 사망

6·25 전쟁으로 고아가 된 한국 어린이들을 돌보는 데 일생을 바친 미국인 부부가 있습니다. 바로 해리와 버서 홀트 부부이지요. 홀트 부부는 1955년 10월 한국의 전쟁고아 8명을 직접 입양해 키웠고, 주변인을 설득해 다른 고아 4명을 입양하도록 주선하기도 했습니다.

1956년 아예 한국으로 건너온 해리 홀트는 구세군 대한본영 내에 사무실을 개설하고 본격적으로 어린이들을 국내외로 입양 보내는 사업을 추진했습니다. 1960년 12월에는 재단법인 ‘홀트양자회’를 설립해 운영했지요. 이후에도 경기 고양시에 장애 아동을 위한 복지시설인 ‘홀트복지타운’을 세우는 등 어린이들을 위해 헌신했던 해리 홀트는 1964년 4월 28일 생을 마감했습니다.​


흑인 폭동으로 폐허가 된 미국 로스앤젤레스 한인가게의 복구작업이 이뤄지고 있다


1992년 4월 29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흑인 폭동 발생

1991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속도위반 혐의로 체포된 ‘로드니 킹’이라는 흑인 청년이 백인 경찰관 4명에게 무차별적으로 구타당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인종차별적인 과잉 진압이라는 흑인 사회의 지적을 뒤로 하고 1992년 4월 29일 배심원들은 백인 경찰들에 무죄 판결을 내립니다.

이런 판결을 용납할 수 없었던 흑인들은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로스앤젤레스 거리로 쏟아져 나와 폭력, 방화(불을 지름), 약탈(남의 것을 빼앗음), 살인 등을 자행합니다. 로스앤젤레스 폭동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본 것은 한인타운에 자리 잡았던 이민자들입니다. 흑인 시위대는 상대적으로 경찰의 보호가 소홀했던 한인타운으로 몰려가 가게에서 물건을 마구 훔치거나 불을 지르며 미국 사회 내 또 다른 소수자였던 한국 출신 이민자들에게 분풀이를 한 것이지요.

▶어린이동아 장진희 기자 cjh062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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