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뉴스
  •  중국과 대만, 그 갈등은 어디서부터?
  • 심소희 기자
  • 2018-09-05 17:00:46
  • 인쇄프린트
  • 글자 크기 키우기
  • 글자 크기 줄이기
  • 공유하기 공유하기
  • URL복사

다른 이념, 갈라진 나라

중국(중화인민공화국)과 대만(중화민국)의 갈등이 나날이 심해진다.

중국은 ‘중국, 대만(China, Taiwan)’이라는 나라 이름을 쓰도록 ‘대만(Taiwan)’에 최근 요구했다. 또 대만과 외교관계를 맺은 나라를 압박해 대만과 교류를 끊도록 했다. 대만과 교류하는 나라는 1971년 62개국에서 현재 17개국으로 줄었다. 한국도 1992년 대만과의 공식적인 외교관계는 끊은 상태. 최근엔 대만 국방부가 ‘중국이 2020년까지 대만을 공격할 준비를 완료하고 추진할 계획’이라는 내용의 보고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중국과 대만 사이는 왜 이렇게 나쁠까? 중국과 대만은 원래 모두 ‘청나라’에 속했다. 하지만 청이 무너진 뒤 등장했던 중국공산당과 중국국민당이 각기 다른 이념을 주장하면서 갈등이 계속됐다. 각 당의 대표자로서 활약했던 마오쩌둥(1893∼1976)과 장제스(1887∼1975)를 통해 중국과 대만이 갈라진 이유를 살펴보자.



아시아 대륙에서 중국(파란색)과 대만(빨간색)을 표시한 것. 한국국방연구원 제공


낡은 청 버리고 새 나라로

청소년 때 처음 서양의 신지식을 접했던 마오쩌둥과 장제스는 서구의 침략에 대항하면서도 나라를 근대적으로 개혁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자연스레 키웠다.

마오쩌둥은 17세 때 ‘급진적이고 서양의 신지식을 강조하는’ 샹샹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세계 역사, 지리, 정치 등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찰스 다윈의 ‘진화론’ 등 서양학자의 책들을 닥치는 대로 읽었던 그는 1921년 중국공산당에 참여하게 된다.

역시 17세부터 근대 지식을 접했던 장제스는 20세 때 일본 도쿄의 군사학교에 입학하면서 쑨원(1866∼1925)의 삼민주의(민족·민권·민생을 주요 가치로 삼는 사상)를 익혔다. 1911년 그는 중국혁명동맹회(쑨원이 도쿄에서 만든 비밀결사조직으로 자주적인 중화민국 건설이 목표)에 가입했다. 훗날 중국국민당으로 발전한 이 단체에서 장제스는 “내 마음에 부끄럽지 않으면 못 할 일이 없다”는 의지를 다지며 뜻을 펼쳐나갔다.




일러스트 임성훈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갈등

중국공산당과 중국국민당의 목표는 ‘외세가 개입되지 않은 독립적인 중국’을 만드는 것이었지만 그 구체적인 모습은 정반대였다. 중국공산당의 목표는 중국을 공산주의 국가로 만드는 것이었고, 중국국민당은 중국에서 삼민주의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쑨원에 이어 중국국민당을 이끈 장제스는 반공(공산주의에 반대함)을 주장하며 국민공산당에 맞섰다.

1946년 제2차 국공내전(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에 승리한 뒤, 중국공산당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장제스는 중국국민당을 이끌고 지금의 대만으로 옮겨가 미국과 관계를 강화하고 ‘자유중국’, ‘대륙반공(대륙의 공산주의에 반대함)’을 주장하며 중국국민당 총재이자 대만 총통이 됐다.

대만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승전국으로 유엔(UN·국제연합)의 상임이사국으로 인정됐었지만 1971년 유엔총회 결의로 상임이사국 지위와 의석을 모두 중국에 빼앗겼다. 오늘날엔 중국의 힘이 커지면서 대만에 대한 압박이 커지는 한편, 중국과 힘겨루기를 하는 미국이 대만과 끊었던 교류를 다시 이어나간다고 밝히며 새로운 갈등도 불거지고 있다.​



▶어린이동아 심소희 기자 sohi07@donga.com

위 기사의 법적인 책임과 권한은 어린이동아에 있습니다.

< 저작권자 ⓒ 어린이동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한국지역난방공사 권지단
  • 댓글쓰기
  • 로그인
    • 어동1
    • 어동2
    • 어동3
    • 어동4
    • 어솜1
    • 어솜2
    • 어솜3

※ 상업적인 댓글 및 도배성 댓글, 욕설이나 비방하는 댓글을 올릴 경우 임의 삭제 조치됩니다.

더보기

NIE 예시 답안
시사원정대
  • 단비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