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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눈높이 사설] 잊혀진 역사 '여성 독립운동'
  • 김보민 기자
  • 2018-08-23 14:5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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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독립운동가

눈높이 사설

동아일보 사설을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춰 쓴 ‘눈높이 사설’이 월, 수, 금 실립니다. 사설 속 배경지식을 익히고 핵심 내용을 문단별로 정리하다보면 논리력과 독해력이 키워집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15일 국립중앙박물관(서울 용산구)에서 열린 제73주년 광복절 및 정부수립 70주년 경축식에서 서간도 무장투쟁을 지원했던 ‘독립운동의 어머니’ 고(故) 허은 여사에 대한 건국훈장 애족장을 아들인 이항증 씨에게 수여하고 있다. 뉴시스

‘남자들은 각처에서 독립을 선언하고 만세를 부르는데… 무지몽매(어리석음)하고 신체가 허약한 여자의 일단(一團·무리)이나 같은 국민, 같은 양심의 소유자이므로 주저함 없이… 동포여, 빨리 분기하자(분발해 일어나자).’ 1919년 3·1독립선언서보다 한 달 앞서 썼다는 대한독립여자선언서다. 중국 서간도(백두산 북쪽 지역)에서 활동하던 애국부인회가 여성들의 독립투쟁을 독려(감독하고 격려함)하기 위해 쓴 격문(사람들에게 알리는 글)이었다.

3·1운동은 남녀 구분 없이 온 국민이 단결했던 민족운동이었다. 여성으로는 주로 유관순 열사만 기억되지만 17세 나이로 3·1운동에 참여했다 옥중 순국(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침)한 동풍신 열사도 있다. 이듬해 3·1운동을 재연(다시 되풀이함)했다 옥살이를 했던 *배화여학교 김경화 박양순 성혜자 소은명 안옥자 안희경 등 ‘제2 유관순’도 적지 않았다. 1920년 평남도청에 폭탄을 투척했던 안경신 열사처럼 작고 연약한 몸으로 항일 무장투쟁(무장을 한 채 싸움)에도 참여한 ‘무명’의 여성도 많다.


배화여학교 학생 6인이 일본 경찰에 체포돼 옥살이를 할 당시의 모습. 국가보훈처 제공

독립운동가 남편을 둔 아내의 희생과 의연함은 끈질긴 독립운동의 밑거름이자 무기였다.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우당 이회영 선생의 아내인 이은숙 여사는 양반가 외동딸로 태어났으나 타지에서 독립운동가들을 밥해 먹이고 삯바느질로 군자금을 대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쪽지 한 장 남길 수 없었던 당시 독립운동가의 숨결을 세세히 기록한 ‘서간도 시종기’라는 회고록(지나간 일을 적은 기록)도 썼다. 도산 안창호 선생의 아내인 이혜련 지사는 자녀 5명을 홀로 키우다시피 했다. 아내, 엄마로 고달픈 나날이었지만 미국에서 대한여자애국단을 구성하고 독립자금을 모금해 조국을 도왔다.

1909년 3월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모두가 함께 느끼는 분노)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수의(장례를 치를 때 죽은 이에게 입히는 옷)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며 사형을 앞둔 안중근 의사와의 면회는 끝내 하지 않았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 안 의사 사후에도 임시정부 뒷바라지를 했던 어머니 역시 독립운동가였다. 그럼에도 여성 독립운동은 잊혀진 역사다. 나라 잃은 설움에 가부장제 속박(얽어맴)까지 여성의 삶은 이중 삼중으로 가혹했을 터다. 나라는 되찾았지만 이름은 찾지 못한 여성 독립운동가가 많다. 더 늦기 전에 치열했지만 가려진 삶이 온전히 빛을 보기를 바란다.


동아일보 8월 16일 자 우경임 논설위원 칼럼 정리

※오늘은 동아일보 오피니언 면에 실린 칼럼을 사설 대신 싣습니다.​




▶어린이동아 김보민 기자 gom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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